▲김대중 전 대통령서울시청 앞 광장
이종찬
"정치와 문학, 언론은 한몸이다""그분은 70년대 박정희와 맞대결한 대선후보로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민주화운동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이미 70년대부터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했고, 남북통일을 위한 이정표를 제시했다. 그분은 일관된 정책으로 수평적 정권을 이끌어가는 인물이었다. 그분은 남북을 아우르는 민족지도자였으며, 이러한 지도자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 두 분뿐이었다"-임효림 스님(시인, 민주화기념사업회 이사)시인이자 언론인 윤재걸은 "그분은 캄캄한 시대 우리에게 민주화와 민족통일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주었다"며 "한때 내가 정치에 몸담았던 것은 정치와 문학, 언론은 한몸이라는 것을 그분에게서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그분 곁을 떠날 수 없었던 것도 정치를 통해서만이 모순된 한국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정목일(수필가)은 "18일 서거하신 그분은 전 국민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국민들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며 "고인의 뜻은 남북통일과 평화를 위해 한몫하는 것이었는데, 이번 서거로 인해 남북관계가 좋아지는 디딤돌이 마련되었다. 온 국민이 그분을 추모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한국문학평화포럼> 홍일선(시인) 수석부회장은 "김대중 선생이 실천했던 인권신장, 민족통일, 민족화해를 위한 간절한 소망들이 작가들의 꿈이 아니겠느냐"라며 "그런 뜻에서 작가들, 특히 시인들은 김 전 대통령을 피붙이로 느끼고 살았다. 그분의 서거는 그 어떤 죽음보다도 무겁고 가슴 아프다"고 덧붙였다.
그 분이 있어야 북한과 미국의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었는데..."비록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우리 곁을 황망히 떠나가셨지만 그분이 타계 직전까지 우리에게 강조하고, 유언으로 남긴 이 땅의 민주회복과 한반도의 상생평화, 민생 및 인권확장이라는 화두는 우리 모두에게 미완의 숙제로 남겨졌다... 그분은 우리 판소리 중 춘향가를 가장 좋아했다. 시를 쓰기도 했던 그분은 모든 예술을 가슴 속에 맺힌 한풀이로 여겼다."-이승철(시인,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 작가 박도는 "내가 김홍걸 군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3월이었다. 그 뒤 그의 아버지(김대중)는 사형수가 되었다"라며 "그때 나는 학교 교지 편집지도 교사였는데, 1981년 가을 교내 문예현상 모집을 했다. 그때 홍걸이가 응모를 했고, 나는 그에게 장원을 주었다. 그 인연으로 나는 김 전 대통령을 몇 차례 만날 수 있었고, 그분의 정치철학을 존경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시인 김창규(목사)는 "이런 어려운 시대에 그분이 돌아가셔서 안타깝고 슬프다. 노 전 대통령이 돌아가신 지 100일이 채 지나지도 않은 때에 돌아가셔서 더 큰 충격을 받았다"라며 "나는 지난 97년 대선 때 시인이자 목사 신분으로 그분 선거운동원을 했다. 이제 우리 문학예술인과 종교인들 모두가 그분 뜻을 잘 헤아려 실천해야 한다"고 밝혔다.
시인 이적(목사)은 "그분이 있어야 경색된 남북관계도 쉬이 풀리고, 북한과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었는데…"라며 "그분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절대적이다. 오래 살아 있어야 했는데…. 이제 진보진영의 남북통일을 향한 영향력이 사라져 버렸다. 너무나 아쉽고 안타깝기 그지 없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로 충격과 슬픔에 휩싸인 문학예술계.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한 그날 글쓴이도 휴대폰 메모란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렇게 가시나요 / 노무현 전 대통령은 만나셨나요 / 님께서 심어놓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 세계평화 / 너무 걱정 마세요 / 살아 남은 저희들이 잘 키워낼게요 / 님께서 저승에서 지켜주시니 / 저희들도 걱정하지 않아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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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언어를 비범한 시적 경지로 끌어올린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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