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완 전 비서실장, 한명숙 전 총리, 유시민 전 장관, 이해찬 전 총리, 문재인 전 비서실장이 지난 10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49재와 안장식을 마친 뒤 국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전례위원회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권우성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에릭 홉스봄이 20세기를 평가한 책 <미완의 시대>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상을 좋아지게 하려고 정치를 선택했다. 따라서 '노무현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친노 세력이라면 정치를 피할 수 없다. 이제 49재도 끝났다. 평화·민주·개혁세력 앞에 대통합이란 숙제도 던져져 있다. 자연스럽게 친노 세력의 행보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대안세력으로 자리잡아 가는 친노 세력친노 세력은 유력한 정치집단이다. 집권과 박해를 모두 경험했다. '노무현 가치'라는 의식체계도 공유하고 있다. 지지세도 간단치 않다. 친노 인사들의 정치활동에 대한 기대감이 48.4%로 시큰둥한 감정(39.4%)보다 높다. 물론 노 전 대통령 서거 일주일 후의 조사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국민들이 서거를 계기로 그와 친노 세력에게 덧씌워진 '반노 정서'를 걷어내고 새롭게 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서거가 내년 지방선거에 영향을 끼칠 것이란 여론이 78.1%였다. 윈지코리아컨설팅 5월 조사다.
노 전 대통령은 부활했다. 친노 세력은 그에 의해 정치적으로 복권됐다. 누구도 더 이상 낙인찍기(stigmatization)로 그들을 옥죌 수 없게 됐다. 되레 눈치를 봐야 할 정도다. 6월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조사한 전직 대통령 호감도에서, 노 전 대통령은 DJ를 훌쩍 넘어서 박정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박정희 38.1%, 노무현 36.0%, DJ 10.7%였다. 박정희를 경험하지 못한 20~30대에서는 박정희보다 2~5배나 높은 압도적인 호감도를 보였다.
지난 5월 말 <중앙일보>의 서울시장 후보 지지도 조사 결과, 유시민 전 장관, 강금실 전 장관, 한명숙 전 총리 순으로 친노 인사들이 2~4위를 차지했다. 6월 초의 R&R의 조사에선, 한 전 총리와 강 전 장관의 순위만 바뀌었을 뿐 유 전 장관을 포함해 역시 친노 세력이 2~4위를 휩쓸었다. 2위 유 전 장관은 1위인 오세훈 시장(17.9%)에 비해 그리 낮지 않은 12.5%였다. 한 전 총리와 강 전 장관은 각각 10.1%, 6.9%였다.
<시사IN>의 서울시장 후보 가상대결에서는 유 전 장관과 한 전 총리가 오 시장을 7~10 포인트 차이로 여유 있게 물리치는 것으로 조사됐다. 부산시장 후보 가상 대결에서는 문재인 전 실장이 현 시장에게만 지는 것으로 나왔을 뿐 다른 후보들에게는 이기는 것으로 조사됐다. 두 조사 모두 진보정당의 후보까지 넣은 가상대결이었다. 따라서 친노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상당히 안정적이라고 하겠다.
친노 세력의 강세, 그 이유가 무엇일까?
친노 세력의 강세 배경은 세 가지다. 서민·민주·균형·평화·탈권위·분권 등을 추진해 온 '노무현'과 부자, 강권, 특혜, 전쟁, 권위, 집중 등을 밀어붙이는 '이명박' 간의 선명한 가치대립이 그 하나다. 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 반민주 통치행태 등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노무현 가치'는 갈수록 더 선명한 빛을 낼 것이다.
대표적인 부자감세 정책인 종부세 인하에 대해 국민의 대다수가 반대의사를 표했다. 한길리서치가 작년 9월에 조사한 것에 따르면, 83.7%의 응답자가 참여정부가 법으로 만든 종부세의 유지 내지 강화를 원한다고 밝혔다. 부동산 관련 세제의 개편에 대해서도 61.3%가 반대했다. 금년 7월의 P&R 조사에서 국민의 71.1%가 법인세와 소득세 추가 인하를 안 좋게 봤다.
현 정부가 명운을 걸다시피 하고 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과 미디어법에 대해 국민의 67.4%와 62.9%가, 비정규직법 개정안에 대해 비정규직 92.3%가 반대의사를 밝혔다. 각각 KSOI, 미디어리서치, 한국비정규직센터의 조사결과다. 여론의 63.7%가 현 정부 출범 이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데에 공감했다.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의 광채를 찾는 건 당연하다.
민주당에 대한 불신도 또 다른 하나다. 민주당이 서거 국면에서 상당한 반사이익을 입은 것은 사실이다. 한때 한나라당에 10%포인트 가까이 앞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민주당을 못 미더워하고 있다. 지난 4·29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DJ까지 동원했지만 전주의 2개 선거구에서 모두 졌다. 뿐인가. 기초의원 선거에서도 민노당에 졌다. KSOI 4월 조사에서 정책이 마음에 들거나 집권 능력이 있다는 등 좋은 뜻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는 비율이 32.9%였다.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이유 중에 좋은 뜻이 점하는 비율(62.2%)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6월 한국리서치 조사에 의하면, 민주당 활동에 대한 평가에서 잘하고 있다는 여론은 27.2%에 불과했다.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무려 64.6%였다. 현재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 53.5%가 잘하고 있다고 했고, 37.7%가 잘못하고 있다고 했다. 더 심각한 게 있다. 지지정당이 없다고 한 무당파 중에서 67.4%가 민주당이 잘못하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잘하고 있다는 겨우 21.5%에 불과했다. 여타 외생변수를 제외하면, 민주당이 자체로 얻고 있는 지지율은 12~13%가 전부다.
역대 선거마다 등장한 '제3지대' 표마지막 하나는 선거 때마다 드러나는 실체, 즉 '한나라당도 싫고, 민주당도 싫다'는 이른바 '제3지대'의 표다. 지난 17대 대선에서 한나라당과 민주당 후보, 그리고 진보진영 후보를 제외한 제3지대 후보들(이회창·문국현)의 득표율은 20.9%였다. 16대 대선에서는 유력한 제3지대 후보가 없었다. 15대 대선에서 제3지대 후보 이인제는 19.2%, 4,925,591표를 얻었다. 14대 대선에서 제3지대 후보들인 정주영·박찬종은 22.7%, 5,396,114표를 획득했다. 14~17대 대선결과를 비교해 보면, 19~23%의 제3지대가 있는 셈이다. 이것이 지금 친노 세력의 지지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고 있다.
이들 제3지대의 표는 16대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에게 분할 흡수됐다. 이회창 후보는 15대에 비해 150여만 표를 더 얻었다. 노무현 후보는 15대의 김대중 후보에 비해 168여만 표 더 획득했다. 16대는 15대에 비해 기권표가 395만 늘었다. 유권자 수는 270여만 명 증가했다. 얼추 더하고 빼면 16대 대선에서 제3지대의 표는 443만 정도가 된다. 다른 선거와 비교할 때 엇비슷한 수준이다.
제3지대의 표가 각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수도권과 영남권에서다. 제3지대 후보들의 수도권 득표율은 17대 대선, 15대 대선, 14대 대선에서 각각 19.9%, 18.1%, 26.8%였다. 영남권 득표율은 각각 22,9%, 25.1%, 19.6%였다.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이다. 참고로 15대 대선에서 DJ는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각각 42.0%, 13.5% 득표했다. 수도권과 영남권은 전체 유권자의 각각 48.5%와 25.8%를 차지하고 있다. 절대적 비중이다. 따라서 친노 세력이 수도권과 영남권에서 안정적 지분을 갖고 있는 제3지대 표를 계속 안고 갈 수 있다면 향후 정국의 조타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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