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관저에서 인터뷰 중인 당시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제공
희망씨, 내가 '각성하는 시민'을 그리워하는 노무현 대통령을 인터뷰한 날은 2007년 8월 31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대통령이 임기를 6개월 남겨둔 때입니다. 그래도 현직은 현직인데 참 이상했습니다. 대한민국 권력 1인자가 '각성하는 시민이 왜 중요한가'를 거듭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정치권력은 만능이 아닙니다, 최정점도 아닙니다. 진짜 권력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시민권력입니다. 각성하는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시민권력입니다."퇴임을 앞둔 노무현 대통령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과목 이름을 붙여준다면 <민주주의론> 정도 되겠습니다. 그는 그 공부를 바탕으로 "퇴임하고 나서 언젠가는 정치학 교과서를 하나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노무현의 민주주의론은 주로 권력과 시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의 표현으로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권력은 위임하되 지배는 거부한다.'무슨 뜻일까요? 제대로 뽑고 제대로 감시하자는 겁니다. 권력을 위임하기 위해 선거를 할 때도 시민들의 각성이 필요하고, 그렇게 해서 선출된 권력이 시민들과 민주적 소통을 하지 않고 '지배'를 시도할 때 그것을 거부하기 위해서도 시민들의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배를 거부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비판할 수도 있지만, 직접 정치권력에 참여하거나, 정치권력 자체를 장악하는 것까지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단, 전제를 분명히 달았습니다. 혁명이 아닌 선거, 투표로 해야 한다고요.
- 지금 대통령을 하고 계시는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조금은 느닷없이 보이긴 합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방법은 시민참여밖에 없다?"그렇습니다."
- 왜 그렇습니까? "국가와 역사의 방향을 끌고 가는 것은, 결국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뽑힌 지도자가 결정합니다.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지도자가 결정되는 것이지, 지도자가 스스로 투표하진 않습니다. 결국, 시민들이 투표를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민들의 각성, 이것이 궁극적으로 답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의 각성. 노 대통령은 그것이 있기 때문에 "어떤 정치가든 시민을 일시적으로 속일 수는 있으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시민들이 각성하면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관계를 정확하게 꿰뚫어볼 수 있습니다. 언론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비자의 선택을 통해서 올바른 언론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노 대통령은 "믿습니다"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그 가능성이 없다고 하면 제겐 아무 길이...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굳게 믿고, 그래서 시민참여·시민운동을 연구하고 있는 겁니다." 신희망씨, 정말 이상한 대통령이죠? 현직 대통령이 "각성하는 시민을 믿는다, 그 믿음이 없으면 내겐 아무 희망이 없다"고 강조하는 것이.
대통령은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시민운동이 권력을 제어하는, 권력의 불법이나 권력의 남용을 제어하는 데 집중돼 있었죠. 이제는 대안까지 함께 만들어 가야 합니다. 말하자면 그야말로 주권자로서, 권력의 주체세력으로서 시민을 양성해 나가야 되는 것이죠." 그만큼 대통령 노무현은 달랐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모든 권력의 1인자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1인자일뿐이라고 보고 있었습니다.
희망씨, 대한민국에는 정치권력 못지않은 경제권력이 있습니다, 언론권력도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체험을 통해 말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권력만 바꿔서는 안 된다, 경제권력·언론권력도 바꿔야 한다, 그러려면 모든 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진짜 실세, 시민이 바뀌어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4. "시민운동의 막강한 후원자 되겠다" 희망씨, 그날 참으로 많은 사람이 모였지요? 오후 1시, 영결식을 마친 바보 노무현이 경복궁에서 노란 풍선 물결인 세종로를 통해 서울광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수십만의 추모 인파 때문에 운구차는 더디고 더뎠습니다.
희망씨, 당신은 그날 그곳에 모인 이들의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나요? '각성하는 시민'을 만나고 싶어 했던 정치인 노무현이 만약 수십만 추모 인파를 보고 즉석연설을 한다면 무엇을 말했을까요?
청와대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 나는 이렇게 여쭤봤습니다.
- 그렇다면 대통령님은 퇴임 후에도 노사모를 함께 하든, 다른 조직을 만들든, 시민운동 비슷한 것을 계속하시겠네요, 퇴임 이후에도? "예. 어떻든 후원은 할 생각입니다. 직접 나서는 게 흉하다고 사람들이 '하지 마라' 하면 못할 수도 있으니까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 막강한 후원자가 될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은 "새로운 시민사회를 조직"해보고자 했습니다.
"지금부터 이제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시민사회를 재조직해 보자, 지난날 노사모라는 것이 역사의 새로운 경험이었는데, 그것을 다시 되살려서 새로운 시민사회를 한번 조직해 보자."그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정치권력을 얼마간 좀 가지고 있었으니까, 돈 있는 사람도 좀 친해 놓고, 또 그중에 나하고 의기투합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이런 사람들 좀 모아 가지고 물적 토대를 만들고, 그렇게 해서 이제 이 작업들을 뜻있는 사람들이 좀 계속하게, 참여정부의 인적 자원들과 전문가들도 좀 포진시키고…."노 대통령은 특히 신흥경제세력과 전략적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시장경제의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뒷거래 시대에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관치경제 시대에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라 시장경제에서 성공한 새로운 시장의 주류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과 더불어서 새롭게, 어떤 새로운 세력을 한번 묶어보려는 모색도 하고요." 그는 종부세 내는 것을 기꺼이 찬성하는 양심적 경제인이 의외로 많다고 했습니다.
"영국의 신사 계급이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히 큰 역할을 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경제인 중에는) 관용의 정신과 타협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내가 만났을 때 '종부세 냅니까?', 이러면 '아, 내죠. 낼 건 내야죠' 뭐 이런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대통령 노무현은 그들과 의미 있는 연대를 하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제 필요한 것이 우선 정치학이죠. 제대로 된 정치 전략을 만들기 위해 정치 메커니즘의 이상과 현실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다음에 민주주의와 지도자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 이런 것들이 우리한테 필요한 지식들이죠." 그는 "정치권력은 기본적으로 정보·공권력·돈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시민사회도 정보를 공유할 수 있고, 대항매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시민들이 권력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은 "아무리 좋은 제도라 할지라도 시민들이 제대로 참여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만들어놓아도 운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어떤 국가적 시스템을 만들어 놓아도 그것을 운용하는 공무원들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민주주의 선거 제도·정당 제도를 만들어 놓아도 그것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걸 제대로 하게 하는 일이 지금부터의 과제입니다."대통령의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결국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행동 속에 있어요, 궁극적으로 거기 있는 것이지, 다른 메커니즘으로서는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어요." 그는 분명 "우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현직 대통령인데도 그 스스로 시민과 함께 "우리"가 되어 그 무엇에 대항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5. "정치권력(대통령)은 만능도, 최정점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