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이 깨지고 집들이 훼손된 골목은 아이와 걷기 위험하지만, 아직 이주하지 않은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즐겁다. 저 골목을 돌아가면 할머니가 뜨개질하며 손녀를 기다리고 계신다.
정진영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있다. 생활에 쓰이는 물건을 내 손으로 만드는 작업이야말로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되기를 바란다. 바늘이 어느 정도 손에 익으면 다음에는 목공을 배울 예정이다.
쿠하에게는 조립만 하면 되는 나무 책걸상을 선물했는데 둘째 아이 까이유의 책상은 엄마가 직접 만들어주고 싶다. 제 아빠와 엄마가 저녁 내내 낑낑거리며 조립한 책상을 두고, 손님이 올 때마다 "우리 아빠가 만들어준 책상이에요, 예쁘죠?"하고 자랑하는 아이를 보면서 든 생각이다.
정말 우리 부부가 나무를 사다가 만든 줄 알고 어쩜 이렇게 매끈하게 잘 만들었냐고 감탄하는 손님들께 민망한 표정으로 "인터넷에서 사다가 조립만 한 거예요"하고 궁색한 대답을 해 왔다. 아이가 18개월쯤 되어 의자에 앉고 싶어할 때 엄마가 손수 만든 나무 의자를 선물하고 싶다.
목공 다음은? 차닦기, 장 만들기, 흙집 짓기 등 아이를 낳은 뒤로 배우고 싶은 것이 끝도 없이 늘고 있다. 바늘로 시작된 손으로 만드는 즐거움이 언젠가 내가 등 기댈 집으로 확장되기를 바란다. 우리말 '짓기'를 더 많은 영역에 걸쳐 쓸 수 있는 사람은 즐겁고 건강한 생활을 하기 마련이다. 매일 나와 내 가족이 먹을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우리가 살 집을 짓고, 내 아이가 읽을 글을 짓고, 우리가 먹을 채소를 직접 짓고 싶다.
내 손으로 만든 물건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 쓰임새가 다 할 때까지 아껴 아껴 쓰게 된다. 남동생이 입고 다니는 구멍이 난 청바지에 퀼트 천을 덧대거나 관광지에서 사온 손수건 지도를 잘라 덧대는 수선쯤은 간단히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동안 바느질을 못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관심이 없어서 못했다. 청바지에 구멍이 나면 원단이 삭은 것 같다며 내다 버리곤 했는데 이제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구제 바지로 만들어 입게 됐다. 작은 바늘 하나에 관심을 두느냐 두지 않느냐에 따라 옷장 풍경이 달라진다.
두 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만 사오자DIY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두 달째 마트에서 장 보는 것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동네 슈퍼에 없는 제품이 마트에는 있는 경우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갈 때가 있지만 채소나 고기, 생선은 마트에서 사지 않는다. 재래시장에 가서 들 수 있는 만큼만 산다. 그러니 자연히 적게 살 수밖에 없다.
8개월짜리 아기를 데리고 재래시장에 가서 한 바구니에 천원, 이천원 하는 채소들을 사면 1만원 들고 가서 열 가지를 사올 수 있다. 서울의 큰 시장에 가서 콩나물 천원어치를 사면 4인 가족이 먹을 경우 3∼4번 끓여 먹을 정도로 많이 준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있다면 두 집이 나눠 먹어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분량의 숙주나물도 한 바구니에 천원이다.
시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냉장고가 가벼워졌다. 자주 사다 먹으니 물러져서 버리는 채소가 없고, 유통기한이 넘어가도록 냉장고 구석에 숨어 사는 포장된 두부가 없어져서 좋다. 상품이 아닌데도 아이를 물건들과 같이 카트에 넣고 다니면서 쇼핑하는 일을 되도록 하지 않을 작정이다.
일 년 내내 집 안 똑같은 자리에 과일 인지 학습자료를 붙여놓고 사과나 바나나를 가르치는 것보다, 쿠하 손을 잡고 시장에서 사과 한 봉지, 바나나 한 송이 사면서 알려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까이유가 걷기 시작하면 우리는 또 시장에서 온갖 제철 과일들을 사먹으며 과일 인지 수업을 할 것이다.
마트에서는 몽땅 고른 다음 한꺼번에 계산대에서 대화하지만, 시장에서는 하나하나 살 때마다 "얼마에요?", "많이 파세요"를 반복하게 되니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와 다니며 물건 살 때 쓰는 말들을 알려주기에 좋다.
불황이 가정 경제에 미치는 슬프고 괴로운 측면도 있지만, 지구 전체를 위해서는 오히려 잠시 쉬어가는 휴식 시간일 수도 있겠다. 공장에서 조금 더 천천히 만들게 되고, 자동차를 조금 덜 사용하게 되고, 물건을 조금 덜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아, 불황이 준 선물이 또 있다. 술자리가 줄어들어 일찍 들어오는 남편에게 아이 그림책을 읽어주라고 할 수도 있고, 외식이 줄어들어 몸에 나쁜 음식을 덜 먹게 됐다. 엄마인 내가 조금 더 부지런해져야 했지만, 그까이꺼, 설거지 한 번 더 하지 뭐!
내가 만든 깨끗하고 담백한 음식으로 우리 가족이 건강하고, 내가 만든 물건을 쓰는 이웃이 더 즐거워지면 그것으로 나는 대만족이다. 이번 기회에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게으름과 작별하고 손과 발을 좀 더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덧붙이는 글 | '불황이 □□□에 미치는 영향'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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