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운 I '황명걸 시에 바치는 그림'. 이런 언덕배기 산동네의 온기는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김형순
신약에 나오는 '가난한 자'의 어원을 성서사전에서 찾아보면 그 뜻이 분명하다. 헬라어인 '프토코스(πτωχο/ptokos)'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구걸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 혹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극빈자'를 말한다. 결코 마음이 가난한 자가 아니다.
약자보호정신은 예수가 제자에게 가르쳐준 기도문 중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와 같은 구절에도 있다. 이는 "오늘 지구상에 한 사람이라도 배가 고파서 죽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라는 호소인데 참으로 엄중한 메시지다.
이에 대한 구체적 실천으로 성서는 '이웃사랑'을 말한다. 물론 이를 지키려면 믿음과 신의 은총이 필요할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만 생존하기위해 이기적이 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구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이웃사랑'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보다 강도가 더 센 '강도 만난 이웃사랑'도 있다.
'이웃'을 그냥 '시민'이라고 한다면 '강도 만난 이웃'은 '서민이나 사회적 약자'를 뜻할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의 명목으로 산동네에서 몇 푼 받고 쫓겨난 사람들 말이다. 성서에서 하느님이 최우선순위에 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이대통령은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성서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웃이라는 개념은 그런 면에서 혁명적이다. 인간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사회를 만들어가는 존재로 보는 것인데,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를 대타존재(Etre pour autrui)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