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의 가족의사소통의 오해로 간 떨어지는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문종성
얼마 후 여인과 아이들 둘이 느릿느릿하게 걸어 나왔다. 그들을 보자 일단 안심이 되었다. 최소한 강도라고 의심되는 자들의 손아귀에 걸려들 일은 피한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둑해졌다. 한 눈에 봐도 다 쓰러져가는 허름하기 그지없는 집.
하지만 나에겐 더 이상 선택권이 없었다. 다시 아픈 오른무릎을 빌어 그 길을 20㎞나 더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경계보다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가족에게 일단 인사를 한 후 스페인어 회화책을 꺼내 들었다. 한 문장 말하고 다시 말하기까지 적잖은 침묵이 있었지만 그들은 생경스런 외국인의 등장이 신기한지 연신 웃어보일 뿐이다.
"저 도로, 위험해요. 강도. 나 도망왔어요. 다시 갈 수 없어요. 그래서 하룻밤, 잠, 머물러도 될까요? 날씨, 춥다. 이미, 그리고 어둡다." 회화책의 문장과 단어, 그리고 바디랭귀지를 조합한 대화는 다행히 가까스로 그들을 이해시킬 수 있었다. 결국 여인의 허락을 얻어 거실에서 자기로 했다. 땅으로 된 바닥이다. 냉기가 도는 지면이라 여인이 매트리스와 침낭을 가져다 주었다.
잠 잘 곳이 마련되자 여유를 가지고 털썩 의자에 앉아 바라보니 그제야 '씨(Si)'만 연발하던 여인의 아들 루이스(13·Luis)녀석과 딸 야하이라(12·yajaira)가 보다 더 사랑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특히 야하이라는 눈망울이 너무 순수했다. 손톱에 때가 끼고 옷차림은 구질구질했으며 머리도 며칠 안 감은 듯 푸석푸석했지만 수줍어하며 시선을 맞추는 그녀의 눈은 정말이지 한 송이 수선화처럼 순수해보였다.
뭐랄까.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엉망진창 진흙으로 보일 정도로 그녀의 눈망울은 촉촉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없는 살림에 최선으로 대해주었다. 아무 대접도 없이 그저 땅바닥 한 자리를 내주며 자라고 했지만 이보다 더 내가 기대할 만한 건 없으니 말이다.
불이 붙지 않는 버너... '숯불라면'을 택하다
"라면 좀 먹을래요?" 가방에서 라면을 꺼내 들었다. 폭우 뒤 폭염이 찾아오듯 놀람 뒤에 안정을 찾자 이내 극심한 배고픔이 찾아왔다. 이제야 먹을 걸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황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호의에 내가 답례로 할 수 있는 건 그저 라면을 같이 나누어 먹는 것 뿐이었다.
"우린 이미 저녁을 먹었는걸요. 괜찮아요." 이미 저녁을 먹었다기에 내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비상식량인 라면 3개를 아낌없이 그들에게 주었다. 성의이자 고마움의 표시로 단지 그것 밖에 할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내가 조금만 더 무언가를 가지고 있었더라도 훨씬 풍성하게 나눌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이 잠자러 가고 난 뒤, 출출해서 라면을 끓여먹으려고 오랜만에 버너와 코펠을 빼들었다. 라면을 끓이기 위해 불을 붙이려고 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도무지 불이 붙지를 않았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했지만 끝내 실패.
그 때 망연자실한 채 주위를 둘러보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름하여 숯불 라면. 마침 한 쪽 부엌에 숯불이 타고 있길래 라면과 물을 냄비에 같이 넣고 익히기로 한 것이다.
과연 끓이는 라면도 물 붓는 컵라면 아닌 숯불 라면이 제대로 완성될 수 있을 것인가? 예상은 적중! 생각보다 잘 익었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후루룩 쩝쩝 소리를 가열차게 내가며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는 비록 식수로 양치한 것 이외에 씻지도 못하고 찬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부엌 땅바닥에서의 잠자리를 준비했지만 안전하다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감사할 수 있었다.
아까 그 강도일지 모를 그들에게 털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낮에만 다니자는 약속을 어겼으니…. 학습효과로 인해 내일부턴 해가 지기도 전에 알아서 숙소를 찾게 될 것이다. 침낭을 뒤집어 쓴 채 일기를 정리하고는 저녁 8시에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고단한 하루가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몸은 피곤했지만 어둔 천장에 그리운 얼굴들이 선명하게 빛이 나길래 머리를 아예 침낭 속으로 집어 넣어버렸다. 눈을 감으면 선명해지는 그리움이지만 물리적 환경으로 어둠을 설정하면 그만큼 빨리 잠이 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