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명진 뉴시스 사진영상국장이정환
- 그 순간, 어땠는가.
"아… 그건, 정말… 정말 전율을 느꼈다. 셔터 누르는 순간, 내 평생의 특종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진기자구나, 내가 사진기자구나. 사진기자로서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다만 이 사진을 당시 신문에 싣지 못했다. 서글펐다. 자극적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사진에 대한 애정이 더욱 큰 것 같다. 내가 사진기자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보람과 긍지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준 사진이다."
물론 저절로 특종이 눈앞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진기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8년이 걸렸고, 8번 직장을 옮겨 다녔다. 은행을 다녔는가 하면, <선데이서울> 등 주간지도 거쳤다.
하지만 고명진 국장의 목표는 오로지 종합일간지 사진기자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있어야 할 현장'에 있고 싶다는 것.
6월 10일, 바로 그 현장, 신발에 흥건했던 핏물
특히 "80년 광주 항쟁 때 현장에 있지 못했다는 것"은 그에게 두고두고 안타까움으로 남았다. 그러다 마침내 1982년, 고 국장은 한국일보 사진부 기자 '명함'을 손에 쥐는데 성공한다.
"1984년에 선배가 낸 사진집 '얼굴'을 접했다. 취재하면서 찍은 얼굴들의 기록집. 바로 이거란 생각이 들더라. 그때 광주 항쟁 당시 사진들, 과연 우리 시각으로 남긴 사진들이 얼마나 있었는가. 물론 말도 못하게 열악한 조건이었다. 들어가면 죽었으니까. 그렇지만 '우리 시각'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 때부터 시작했다. 우리 기억은 우리 손으로 남기는 것이 좋겠다고. 사회부를 통해 수집한 정보로 '꼭 나가야 하는 시위 현장'이라고 데스크를 설득했다. 마지못해 허락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나는 현장에서 편하게 취재했다. 신문에 꼭 나가야 한다는 부담이 없었으니까."
심적 부담은 없었을지 몰라도, 신체적인 '부담'까지 피하기는 어려웠다. 극도로 격렬한 시위 현장을 따라 다니면서 "입원 많이 하는 기자"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11일 자 <한국일보>보도에서 '고명진'이란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