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회를 마치고 성공회 대성당을 빠져나오다 경찰과 대치 중인 국본 지도부와 성공회 신부들. 사진 가운데 머리띠를 두른 유시춘 당시 국본 상임집행위원의 모습이 보인다.유시춘 제공
그리고 오후 6시가 됐다. 힐튼 호텔에서 '민정 연주단'과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노태우의 애창곡 베사메무쵸가 흘러나오던 그 시간, 범국민대회가 열린 성공회 대성당은 경찰의 철통같은 봉쇄에 갇혀 있었다.
인터넷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땡노 뉴스'만으로는 바깥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6시 정각이었어요. 애국가 소리와 함께 경적 소리가 막 들리는 거예요. 태평로를 지나가는 차량들이 울렸겠죠. 얼마나 감동이 일렁거렸는지…. 결의문 낭독과 만세 삼창으로 대회를 마치고 '우리도 어떻게든 나가 보자' 해서 지금의 세실 레스토랑 방향으로 나오다가 10분 만에 모두 체포됐죠. 그래도 '호헌철폐, 독재타도', 참…, 원 없이 외쳤어요."
허나 그 때까지만 해도 유시춘은 '6월 10일'의 진면목을 알 수 없었다.
남대문경찰서에 갔다가 구로경찰서로 호송될 때까지만 해도 국본 집행부를 어떻게 처리하란 지시가 없는 줄로만 알았다. 구로경찰서 앞마당을 가득 메운 대학생 2000여 명과 마주치고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만 직감했을 뿐이었다.
그는 구로경찰서에서 청량리경찰서로 압송당하는 길에 살짝 열린 문으로 엿본 바깥 풍경을 통해 비로소 승리를 예감했다고 한다.
"마포로 해서 광화문으로, 거기에서 청량리로 가는데…, 글쎄 세상에… 종로통이 완전 전쟁통이더라구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돌멩이들, 그리고 신발들. 뭘 태웠는지 연기가 막 나고 있고, 거리는 물바다고…, 이게 보통으로 성공한 게 아니구나… 가슴이 벌렁벌렁 뛰더라고.
옆에 있던 제정구(1999년 작고) 선생님께 '성공했나보다' 말씀드리니까, 선생님이 '그럼 우린 징역 5년이오(웃음)'. 차 안이 완전히 칠흑 같은 암흑이었거든요. 문틈으로 잠깐 빛이 들어오는데…, 뭐랄까요. 칼날 같은 빛줄기가 캄캄한 암흑을 베고 들어오는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내 평생 잊지 못하는 날이죠."
[에필로그 : 2007년 5월 4일]
여기까지 유시춘의 잊지 못할 '사흘'을 살펴봤다. 그 중에서도 6월 10일은 최근 국가 기념일로 지정됨으로써, 대한민국이 '평생' 잊지 못할 날로 공식화됐다. 하지만 6월 정신은 오히려 갈수록 퇴색하는 듯하다. '민주(民主)'가 '금주(金主)'로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닐까.
- 1987년 6월이 갈수록 퇴색하는 듯 합니다.
"서구 사회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로 가는 데 수백 년이 걸렸어요. 그런데 우리는 반세기 만에 여기까지 왔죠. '6월'은 돌연변이적 진화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래서 6월 항쟁의 가치를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 같아요. 피와 땀과 눈물을.
이제는 모두 잘 먹고 잘 살고 싶어해요. 좋은 교육, 평등 임금, 좋은 환경… 사회권에 대한 관심이 높죠. 하지만 모두를 만족시키려면, 막강한 국가 가용 자원이 필요해요. 그래서 행정부와 국회의 판단과 선택이 필요하겠죠. 점진적 달성이 필요한 문제라고 봐요. 민주주의, 완성태가 아니잖아요? 우리가 더 완성시켜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도록 만들어야 '6월 정신'이 박제가 되지 않을 수 있겠죠."
- 6월 정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역사는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성장이라는 점에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요. 6월 항쟁을 통해 확인한 교훈이죠. 생각해봐요. 86년 10월에 건대 사태 있었죠. 천 명이 넘는 학생 운동 세력이 구속됐어요. 운동가들 모두 수배 아니면 구속이었습니다. 활동가들의 손발이 다 묶인 상태였어요. 그 폐허 위에서 6월 항쟁이 성공한 겁니다. 국민들이 일어나 성공시킨 것이 6월 항쟁이예요.
물론 6월 항쟁은 그 출발부터 지도부가 있었다는 점에서 4·19나 5·18과는 확연히 구별됩니다. 큰 진화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국본은 바짝 마른 짚더미에 작은 불씨 하나 던졌을 뿐입니다. 그런데 확 일어나 버린 거죠. 그 결과 어땠죠? 반동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6월 항쟁을 통해 확인된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거스를 수 없었어요. 87년 이후 민주주의 성장과 남북 평화 공존이란 방향으로 일관되게 진행됐습니다. 집권자 그 누구도 되돌릴 수 없었던 거죠."
| | "산업화 세력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 | | <다큐 6월 항쟁> 발간을 앞두고 | | | |
| | ▲ 2005년 유시춘씨가 펴낸 민주화운동실록 <우리 강물이 되어>. | | 6월 항쟁 20년을 맞아 유시춘 위원장이 많은 노력을 들인 사업이 바로 당시 항쟁 참여 주역들이 작성한 수기와 증언을 중심으로 구성한 역사 기록 <다큐 6월 항쟁> 발간이다.
상임편집위원으로 40여명에 이르는 필자 대부분을 일일이 만났다는 유 위원장은 지난 2일 기자간담회를 통해 "관련 기록이 없는 경우가 많아 단편적 기억들을 복원하는 과정이 무척 힘들었다"고 소감을 밝힌 바 있다.
- 관련 기록이 없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
"역사적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공신력 있는 집단에 의해 정사로 기록할만한 기초자료가 없다는 말이다. 항쟁 참여 주체들이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결성이 됐고, 어떤 활동을 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역사라는 것이 대부분 지배자의 기록이다. 저항의 기록은 정사로 남아 있기 어렵다."
- 그와 같은 현상은 일반적이지 않나? 6월 항쟁의 중요성을 깨닫는 주체들이 진작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기록 문화의 후진성 아니겠나. 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낮은 수준이다. 물론 수구 세력과의 대치 국면에서 정국을 끌어가기 위한 에너지들이 집중됐던 것도 이유 중 하나다."
- 이번 작업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재야 운동이나 학생운동 경우에 기록이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일상적인 압수 수색에 시달렸으니까. 메모지 한 장 갖고 있다가도 징역 사는 판국 아니었나. 이쪽의 경우는 오히려 기록 소각의 역사라고 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민주통일'이나 '민중의 소리'에 남아 있는 기록을 토대로 일일이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를 통해 퍼즐 맞추기 식으로 복원해냈다. 이해찬 전 총리, 김부겸 의원 등이 적극적으로 취재에 응했다."
- 짧은 시간에 끝날 일 같지 않다.
"물론이다. 굉장히 불완전한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미완의 기록이다. 앞으로 보강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라도 해 놓지 않으면, 후세 역사에 대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
- 발간 후에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산업화 세력이다. 70∼80년대 학번으로서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에서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며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밑둥을 이뤘던 사람들. 나라가 어떻게 가고 있는지, 정치권력의 성격이 어떤지 살필 겨를 없이 경제성장을 위해 총력 투쟁했던 그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자신들의 노력만큼이나 정말 천신만고 끝에 민주화가 이뤄졌다는 것을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다."
<다큐 6월 항쟁>은 1차 원고 검토와 집필이 완료된 상태로, 향후 2차 원고 검토를 거쳐 6월에 정식 출판된다. 자료집 3권, 사진집 1권을 포함해 총 4권으로 발간될 예정인 <다큐 6월 항쟁>은 각 학교, 언론사, 연구기관, 지방자치단체 등을 포함한 5천여 곳 도서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 이정환 | | | | |
덧붙이는 글 | 기사 원문에 있었던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초대 총무'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총무'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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