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6월 29일의 특별 선언! 나는 그 날을 잊지 못 한다. 온 국민이 열광한 기쁨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우선 그것은 내가 가진 갈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 날 나는, 개인적으로 진급을 했거나 분양아파트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그 날 지하철을 탔다가 뿌려지는 호외를 받아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옆에 선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도 생판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직접 자기 일도 아니면서 그렇게 하나 되어 기뻐하는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물론, 훨씬 더 나중인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가 4강에 올랐을 때 비슷한 상황을 한 번 더 경험하기는 했지만….
한 달 뒤쯤, 나는 대만으로 국비 유학을 갔다. 수교 전이었으므로 대만은 곧 중국이었다. 내가 만난 많은 중국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며 "한궈, 리하이!(한국, 대단하다)"를 연발했다.
그들도 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과 학생이 죽기 살기로 최루탄을 쏘고, 곤봉으로 후려치고, 돌을 던지는 시위 모습은 대만 TV에도 수시로 보도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정말 기이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한국을, 아니 나를 추켜줄 때 나는 참으로 뿌듯했다. 저 밑바닥에서 저절로 긍지와 애국심 같은 것이 뭉클거렸다.
그 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 진영인 김영삼, 김대중씨의 분열로 노태우씨가 당선되었다. 나는 그 때, 두 김씨의 양보없는 권력욕이 빚어낸 결과라면서 가슴 속으로 통탄을 했다. 한국 정치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은 중국인 동급생들도 "두 김씨가 표를 갈라먹어서 노태우씨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부끄러운 감회, 다시 한번 그들에게 사죄드린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올림픽도 치르고, 또 2002년 월드컵도 치렀다. 그 뒤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항쟁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부분적인 이익집단의 시위와 투쟁은 여전히 산견되지만, 정권을 상대로 온 나라 민중이 한 방향으로 항쟁하는 역사는 끝났다.
그것이 6월 항쟁의 공헌이요, 위대성이다. 언제든지, 정의롭지 않은, 민중의 뜻에 반하는 권력은 반드시 성난 파도 같은 저항에 부딪히고 말 것이라는 것이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다.
요즘, 정치 지도자의 반열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많다. 나같이 대열에 함께 서지 못한 보통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의롭고 용감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점차 사리와 당략에 흔들리는 걸 보면 조마조마할 때가 많다.
나는, 누구보다도 감격스러울 그들이 이번 20주년을 계기로 일신하기를 희망한다. 그 '6월 정신'의 순수한 희생과 열정이라면 이 시대의 민주와 복지를 이룩하는 데 분명히 막중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들보다도 더 그날을 기리고, 더 일신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민중들이라는 점이다.
그 6월을 위하여 희생된 분들은 너무도 많다. 더러는 유치장에서 잠을 설쳤고, 피를 흘리거나 최루 가스에 괴로움을 당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학업을 중단하거나 취직을 포기하였다.
이제 지천명을 넘긴 나는, 20년 전 그날을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감회가 남다르다. 그날의 값진 항쟁을 위하여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거듭 사죄하면서 그 6월의 정신이 늘 우리 사회에 살아있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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