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돌마저 화사하게 만드나요? 겨울과는 또 다른 우물의 풍경(3.25)김유자
우물에서 나를 들여다 보다
성벽을 바라보며 한없이 머물고 싶은 생각을 지그시 누르며 길 위로 올라와서 북쪽 끝에 있는 북문지로 향합니다. 북문지에서 쭉 가면 금병산에 이르게 됩니다. 북문지 밖에서 북문지를 들여다 보다 다시 안쪽으로 들어와서 서문지로 가는 희미한 길을 내려갑니다.
서문터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는 돌로 만든 우물이 있습니다. 성의 입지를 결정하는데 물의 존재가 작용했다면 이 우물은 아마 처음 성을 쌓았던 백제시대부터 있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성에서 백제시대 후기에서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성에 사람이 살고 있었던 동안엔 이 우물도 쓰임새를 잃지 않았을 테지요. 우물은 아주 깨끗해서 최근까지도 누군가가 사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중간에 언제, 몇 번이나 개축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도 이 우물의 석축은 견고하고 물도 마실 수 있을 만큼 깨끗해 보입니다. 올 1월 눈보라가 희끗희끗 날리던 날 아침에 이곳에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발자국 소리가 낸 인기척에 놀란 어린 고라니 두 마리가 후다닥 뛰쳐나와 북쪽으로 도망가는 광경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후 저는 이 샘을 고라니 사촌인 '노루샘' 이라고 부르기로 했답니다.
눈이 쌓였을 때 이곳에 와서 우물을 오래 들여다 보면 알싸하게 아픈 마음이 스쳐갑니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생각나서일까요? 시의 마지막 연을 가만히 읊어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길거나 짧거나, 멀리 가거나 가까이 가거나 모든 여행은 끝에 이르게 되면 자신의 자화상을 점검하게 마련입니다. 마냥 즐기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없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여행은 반성하고 싶은 자가 떠나게 되고 그 사람은 반성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에 묻은 티끌을 씻어내고 제 자리로 돌아옵니다.
적오산성의 우물은 나를 들여다 보게도 하지만 우리 역사를 들여다 보게도 합니다. 문득 개인의 역사거나 민족의 역사거나 맘껏 도취할 만한 나르시시즘을 갖지 못한 역사는 슬픈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서문지 근처에는 꽤 너른 건물지가 있습니다. 그 건물지에서 보면 산성 내의 지형이 동쪽은 높고 서쪽이 낮은 동고서저의 형상이라는 게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냥 높은 게 아니라 동쪽은 거의 절벽처럼 보입니다. 서문 터에 서서 서북쪽을 바라보니 우산봉과 갑하봉이 바라다 보입니다. 먼 산이 가깝게 느껴질 때는 봄이 온 것이라는데 꼭 오늘이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