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발처치곤란, 그러나 귀한 꽃다발.
김성호
상만 받고 가기엔 아쉬운 걸음이다. 항해사 자격을 얻기 위해 교육받던 시절 추억이나 살려볼까, 이틀의 말미를 냈다. 가고팠던 음식점은 망해 없어지거나 휴일이거나, 그래도 그대로 나쁘지는 않았다.
'김성호의 바로여기'에서 언제가 소개할 기회가 있을 '송상현 광장'에도 들러보고, 부산에 사는 지인들과 만나 책과 글을 두고 대화를 나눈다. 여행지에선 많이 걷는 편인데 영 거추장스러운 건 한 팔에 들린 꽃다발이다. 단상에 올라 상장, 상금과 함께 꽃다발을 받았던 것이다. 부산은 큰 도시지만 꽃다발 안길 처자 하나를 만나지 못하고 온통 친구들과만 진탕 마시다가 비틀대며 자갈치 시장 앞 여관까지 꽃다발을 들고 들어갔다.
세상에 글이 귀한 만큼, 글로 얻은 것 또한 귀하다. 쓰잘데기 없는 꽃다발이라도 글로 얻은 것이니 귀히 써야 한다. 여관방 쓰레기통을 잠시 보다가는 꽃다발을 다시 챙겨 자갈치 시장 앞 생선구이 집에 자리를 잡는다. 웬놈이 양복에 꽃다발을 든 채 혼자서 생선구이를 먹는가. 옆 가게 아지매들까지 때 아닌 관심이다. 시장 아지매들에게 부산 사는 애인을 만나러 멀리서 온 총각 행세를 하다가, 팔팔년에도 안 통할 연애비법을 한참이나 전수받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목적지는 부산어린이대공원이다. 이곳 너른 터에 부산학생교육문화회관이 있다. 그 앞 광장에는 사위를 둘러 동상이며 조형물이 늘어섰는데, 부산항일학생의거 기념탑과 위안부소녀상 같은 것들이다. 기념탑과 소녀상 사이, 그러니까 회관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곳에 선 두 개의 석상이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다. 의사자 이수현 추모비다.
2000년이었다. 세상이 끝날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었던 2000년이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는 온통 괴로운 일로 가득하였다. 어느 교사에게 매일 같이 따귀를 맞았고, 종일 수업 대신 책만 읽었다. 별 볼 일 없는 학교야 콱 때려치면 좋았겠으나 멀리 미국까지 가서 제 일을 하고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교과서엔 온통 멍청한 이야기들 뿐이고, 즐거운 일은 죄다 돈이 드는 탓에 할 수 있는 건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일 뿐이었다. 그 시절 많은 양서와 만났으나 그중 가장 꽂혀 있던 것은 바로 <맹자>였다.
의로움에 대해 배웠다... 그를 보았다
<맹자>엔 많은 가르침이 있지만, 그중 두드러지는 것이 의로움에 대한 것이다. 사생취의(捨生取義), 네 글자로 대표되는 의로움이 곧 맹자 사상의 정수라고 나는 믿었다. 인간이 가진 귀한 것은 고작해야 목숨뿐인데, 세상 어느 의로움은 그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룰만한 것이다. 세상에 난 사내라면 그 의로움을 찾는데 삶을 바치는 것, 책이 어찌나 격렬하던지 나는 거의 부들부들 거리며 책장을 넘기고 다음날 다시 또 넘기고는 하였다.
그로부터 많은 책을 읽었으나 유가의 가르침은 대체로 나와는 맞아 떨어지지가 않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옭아매는 의무들만 얹어지는 것이, 알면 알수록 불편한 세상이 꼭 이런 것인가 싶었다. 유가의 가르침은 대체로는 선한 이들에게 어우러지는 것인데, 선이란 나를 넘어 남에게 닿는 것으로써 별 볼일 없는 자식일랑 돌멩이 보듯 대하던 중학교 시절의 나와는 영 맞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1월 26일 저녁이었다. 일본 도쿄 신오쿠보 전철역에서 20대 청년 이수현이 죽었다. 뉴스는 그가 전철역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려다 기차에 치여 숨진 정황을 알렸다. 나와는 띠동갑으로, 고작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였다. 고려대 4학년을 휴학하고 일본에 어학연수차 떠난 지 반년만이라 했다.
다음날 만난 어느 친구는 개죽음이라 했다. 평생 공부만 하다가는 이름도 모르는 이를 살리려고 기차에 치여 죽었다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누구도 살리지 못하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