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우현 위원장이 전사한 참새골. 사진 속 인물은 증언자 윤종한.
박만순
내암리 참새골에서 최후를 맞은 박우현은 누구인가? 1910년 10월 19일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난 박우현은 일제강점기에 민족해방투쟁의 대열에 참가했고, 해방 직후에는 조선공산당 함경북도당 선전부장을 맡았다. 1950년 6월 모스크바 당중앙학교에 유학 중 한국전쟁이 터져 그해 7월에 충남도당 위원장으로 임명돼 대전으로 파견됐다.(김광운, <북한정치사 연구 1>, 2003)
1950년 9월 말 UN군의 진격으로 충남도당의 주력부대는 대둔산으로 이동했다. 군경토벌 작전으로 충남도당은 대둔산에 안주할 수 없었다. 소련(러시아)혁명 기념일인 1950년 11월 7일 충남부대(백두산부대와 논산군 유격대)와 호남부대는 합동으로 충남 논산군 구자곡면(현재 논산군 연무읍)을 습격했다. 지서를 단숨에 습격해, 유치장에 구금됐던 이들 10여 명을 구출한 유격대는 논산군(현재의 논산시) 강경읍으로 진출했다.
곽해봉 부대로도 불린 백두산부대는 2개 조로 나뉘어 한 개 조는 강경경찰서를 습격했다. 경찰서 창고에 구금됐던 300여 명이 구출됐다. 고문과 굶주림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는 이들은 불과 20여 명만이 빨치산을 따라 입산했다.
다른 조는 강경역사를 불태우고 호남선을 폭파시켜 철도교통을 마비시켰다. 그날 밤 빨치산부대는 의약품과 신발을 대량 확보할 수 있었다. 충남부대가 강경읍을 휘저은 것은 구자곡면 습격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 뒤인 1950년 11월 9일이었다.
충남도당 위원장 박우현의 진가가 돋보인 것은 전북 완주군 운주면 용계원에서의 전투였다. 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이 서울을 점령(소위 '1.4 후퇴')한 것을 기념하는 충남도당 집회가 1951년 1월 14일 운주면 용계원에서 벌어졌다. 하지만 경찰의 기습으로 양편의 교전이 이루어졌다.
박우현 위원장은 "두만강 부대는 우측으로, 대둔산 부대는 좌측으로"라고 외치며 진두지휘를 했다. 경찰들은 거대병력이 있는 줄 지레짐작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사실 박 위원장은 있지도 않은 부대 이름을 부르며 작전명령 하듯이 외친 것이다. 그의 지략이 돋보인 작전이었다.(<통일뉴스>, 2018.3.17. 임방규, '충남 빨치산 전적지 답사')
옥천역 습격과 제3지구당 출범
충남도당의 주력부대는 대둔산에서 논산을 경유해 전북 완주군 운주면 방향으로 이동한 반면 충남도당 압록강 부대(윤가현 부대)는 대둔산에서 옥천으로 이동했다.
1951년 1월 10일경 충남부대 압록강 부대는 충북 옥천군당과 합동으로 경부선에 폭탄을 매설하고 멍석을 물에 적셔서 철로에 깔아 놓아 군용열차를 폭파시켰다. 이로 인해 경부선이 근 일주일간 마비됐다.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초까지 전개된 충남도당 유격대 투쟁을 이끈 지도부는 다음과 같다. 위원장 박우현, 부위원장 겸 충남빨치산 총사령관 박천평, 도 인민위원장 윤가현, 2대 인민위원장 곽해봉, 선전부장 겸 노동신문 주필 세민(가명), 기요과장 라실(가명) 등으로, 충남도당 산하의 전체 인원은 약 1000명 이었다.(임방규 글)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과 빨치산의 처절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전선은 3.8선에서 고착화되됐다. 이에 남한지역의 빨치산은 대열을 새롭게 정비했다. 1951년 6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남한 6개 도당 위원장 회의가 소집됐다. 참석자들은 유격대를 하나로 묶는 남부군 결성에 합의를 이뤘다.
총사령관에는 이현상, 충남북을 총괄하는 3지구당 위원장에는 박우현(가명 남충열)이 선임됐다. 빨치산투쟁이 장기화되면서 빨치산 대오는 와해됐고, 3지구당 위원장 박우현 역시 충북 청원군 가덕면 내암리 비트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최후를 맞은 것이다. 내암리에서 탈출한 김종하와 송영길이 1955년 봄 충남 천안군에서 생포됨으로써 충남도당은 막을 내리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