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 갓길 아래 낙엽 쌓인 곳이 학살지. 길게 구덩이로 팜.
김영희
- 노산공원에 충혼탑을 옮긴 이유가 있습니까?
"보도연맹학살지와 충혼탑은 서로 상충되니 장소를 옮겼어요."
- 혹시 이곳에 '보도연맹학살지 안내 표지판' 세우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지 않을까요?"
유족들의 대부분 생각이 옛정서와 유교적인 관점에서의 사고로 생각하시는 경향이 많다. 시민들이 혹시 혐오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인식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그동안 국가가 은폐해 '연좌제'를 일삼았기에 유족들은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살은 세월이니 그럴 만도 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노산공원을 뒤로 하고 돌아서 어르신과 간단한 식사를 하러 갔다.
따뜻한 인삼차 한잔으로
어르신이 안내한 중화요리 전문점은 삼천포에서 어르신이 잘 아시는 곳인 듯했다. 주인장과 인사도 나누시고 만두 서비스도 주신다. 짜장면과 소주 한 병을 주문하신다. 식사 중 술 한 병을 후딱 드셨다. 식사하면서 이런저런 대화 중에 "이제 나도 늙어서 조용히 살고 싶어요" 하신다.
식사를 마치고 어르신 댁에 도착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 집에 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가시오" 하신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단호하셨다. 실례를 무렵 쓰고 잠시 들어가니 아내와 따님이 함께 살고 계신다. 아끼는 인삼차를 내어놓으신다. 간단히 마시고는 인사를 하고 댁을 나섰다.
용현면 석계리 온정마을 매장지는
온정마을 석계리는 유족이 연로하셔서 필자와 동행해 주실 분이 없어 답사를 못했다. 그곳은 사천 정동면 보도연맹원들이 40~50명을 트럭에 싣고 삼천포 바닷가에 수장시키기 위해 가던 중에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트럭이 고장 나버렸다. 그래서 삼천포 바닷가까지 못 가고 온정마을 입구에서 학살하고 가버렸다고 한다. 시신은 한 달쯤(8월 25일경) 후 인민군 점령기(이하 인공시)였기에 시신 수습이 가능했다. 어느 지역이나 인공시기는 학살지에 인부를 동원시켜 시신을 수습하는 데 독려해준 것이 인민군이었다.
잔혹하고 사악한 가해자들
어르신은 잔혹하게 형을 죽인 주모자를 알고 계신다. 삼천포경찰서장 ㄱ은 남해 이동 사람이었고 동부경찰서 순사 ㄴ은 총잡이였다. 그리고 ㄱ은 형을 고소한 사람이다. 훗날 이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만나질 못했다고 한다.
어느 날 영도다리에서 저만치 걸어오는 한 사람을 유심히 보니까 ㄱ이었다고 한다. 순간 상대도 이봉환 어르신을 먼저 보고 눈치를 챈 듯 쫓아갔지만 어디로 도망을 쳤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잡지 못했다. 지금도 잡히기만 하면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고 하신다. 어르신의 상흔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맺은 말
사천지역 매장지를 다니면서 느낀 점은 시신을 거의 수습해 갔다는 것이다. 가까운 진주에서는 보복이 무섭기도 하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학살됐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인민군이 입성하기 전에 학살했기에 수습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사천지역은 인민군이 입성해 경찰서와 지서 문을 열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니깐 경찰서 근무자들이 명단을 공개하면서 질매섬은 몇 명 명단이 공개됐고 노산공원도 누가 학살됐는지 명단이 공개됐다. 그랬기에 유족들은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유족들은 진실을 밝히고 후손들에게 알리는 것을 시민에게 혐오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신다. 하지만 진실된 역사를 드러내어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꿔야 한다. 유족들의 생각이 안타깝다. 또한 사천 유족분들이 거의 80세 중반을 넘어 노령이라 활동하시는데도 한계와 어려움에 봉착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천시는 청산되지 않은 사천지역 민간인 학살지를 조사해 잘못된 역사, 즉 국가의 폭력으로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한 장소에 표지판을 세우는 것이 책무이다. 하루빨리 노산공원에 학살지 표지판이 세워지길 기대해 본다.
(* 21화 밀양편이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