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휘호 액자 밑에 서다(오른쪽 김진 광복회 부회장, 왼쪽 기자).
광복회 홍보팀장 임소희
(지난 기사
"저의 할아버지 백범은 민족밖에 모르는 촌부였습니다"에서 이어집니다)
주중 대사를 원했던 아버지
- 백범 손자로 살아오신 애환을 들려주십시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로부터 무척 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행여 할아버지 상관된 일은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내 마음을 다른 이에게 솔직히 드러내지도 말라'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시 친구들에게 도무지 말이 없는 '내성적인 아이'로 비쳤답니다."
백범 서거 후 당신 집은 24시간 도청을 당했단다. 거의 매일 대문 앞에는 엿장수, 양은장수, 땜장이 등으로 변장한 감시(정보)원들에게 출입자 감시 등 요시찰대상으로 거미줄과 같은 촘촘한 감시망 속에 살았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 제가 들은 바로는 백범 서거 후, 우남장(이승만 대통령)께서 아버님(김신)에게는 상당한 호의를 베푸셨다고 하던데요.
"제가 아버님에게 듣고, 지켜 본 바로는 할아버님 시해사건 이후 우남어른께서 '아버님에게 미국으로 이민을 가라'고 하셨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 오로지 당신이 맡은 바, 군무에만 묵묵히 충실하셨답니다. 공군참모총장이 되신 것은 4.19 이후 장면 정권 때였고, 주중대사가 된 것은 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시절이었습니다."
- 그때의 얘기를 아시는 대로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십시오.
"아버님이 공군 참모총장으로 예편한 뒤였습니다. 어느 하루 박정희 대통령이 불러서 청와대로 찾아뵙자, 국방부를 맡아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저는 적임자가 아닙니다'라고 사양하셨답니다. 그러자 다른 희망 보직을 묻기에 '주중대사(당시 장개석 정부)를 맡겨주신다면 신명을 다해 양국의 친선과 우의를 돈독히 하겠다'고 말씀 하셨답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주요 5개국 대사도 아닌, 왜 하필 중국이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지난날 나라 없는 백성으로 이 나라 백성 및 임시정부가 중국땅으로 망명하여 풍찬노숙하는 망국민의 어려움을 장개석 총통이 물심양면으로 많이 도와 주셨습니다. 그 은혜를 제가 주중대사로 부임하여 조금이라도 갚는 게 결초보은의 도리다'라고 말씀 드렸답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곧장 발령을 내주시더랍니다.
중국정부(당시 장개석 자유중국 정부)도 그 이튿날로 곧장 아그레망을 보내주셨답니다. 그래서 당시 저는 이대부중에서 한 학기를 다니다가 아버님을 따라 대만(중화민국) 국제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