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보틀에 담긴 와인스윙보틀에 와인을 가득 채우면 병 안에 유입된 공기량이 극히 적어 산화를 늦출 수 있다.
임승수
사진 속 작은 스윙보틀의 용량은 250mL다. 와인 한 병이 750mL이니 스윙보틀 세 개에 옮겨 담을 수 있다. 스윙보틀에 와인을 가득 채우면 병 안에 유입된 공기량이 극히 적어 산화를 늦출 수 있다. 이렇게 냉장고에 보관하면 며칠 있다 마셔도 상태가 썩 괜찮다.
이런 꼼수를 쓰게 된 건 와인을 매일 한 잔씩 마시기 위해서였다. 누가 말하지 않았나.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며칠 간격으로 한 병을 마시는 것보다 저녁 식사 때 아내와 매일 한 잔씩 마시면 소소하나마 행복의 빈도가 잦아진다. 와인 한 병을 250mL짜리 스윙보틀 세 개에 나눠 담고 하나씩 꺼내어 먹는 그 꿀맛이란.
주문한 모듬전이 도착했다. 드디어 추억의 레드 와인을 개봉해 잔에 따라내어 한 모금 맛보았다. 어? 예전에는 드라이한 것 같았는데 오늘은 살짝 잔당감이 있네? 1만 원대임을 고려하면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뭔가 아쉽다. 8년 전 기억은 정녕 왜곡과 미화의 결과물이었던가.
일단 찝찝함은 제쳐놓고 레드와 화이트 비교 체험에 들어갔다. 묵직한 깻잎전 하나를 와구와구 씹은 후 레드 와인을 마셨다. 잠시 후 똑같은 방식으로 화이트 와인을 마셨다. 확연한 차이가 감지된다. 어느 쪽이 이겼냐고? 레드가 훨씬 낫다. 화이트에 비해 타닌과 바디감이 강한 레드는 깻잎전의 뻑뻑하고 묵직한 질감과 한층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그에 비하면 화이트와 깻잎전은 서로 서먹서먹하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깻잎전이 역도 선수고 화이트 와인이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데, 무슨 일인지 한 체육관(구강)에서 두 종목 대회를 동시에 치르는 격이랄까. 어색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내 역시 화이트보다 레드가 낫단다. 평소 화이트 와인의 열혈지지자인 아내조차 손을 들어줄 정도이니 레드의 완벽한 승리다. 이제 화이트는 저만치 밀어놓고 레드 위주로 술잔을 기울였다. 아내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다가 어느덧 마지막 잔이 남았을 때였다.
분명 떫었는데... 갑자기 왜 맛있지?
이것 봐라? 갑자기 와인이 왜 이렇게 맛있어졌지? 갓 개봉했을 때보다 잔당감이 누그러들고 맛의 균형감이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다. 어이쿠! 이 와인을 너무 섣부르게 판단했구나. 애초에 삼십 분이라도 브리딩을 하고 마셨다면 훨씬 나았을 텐데.
브리딩(breathing)은 와인을 개봉해서 공기와 접촉하게 만드는 행위를 의미한다. 와인은 대체로 개봉해서 바로 마셨을 때보다 일정 시간 동안 공기와 접촉하면 떫은 맛이 한결 부드러워지고 맛과 향의 밸런스가 개선된다.
특히 고급 와인의 경우는 그 차이가 더욱 극명해서 와인 애호가들은 마시기 서너 시간 전부터 애지중지 브리딩을 하기도 한다. 저렴한 레드 와인도 대체로 삼십 분 정도 브리딩을 하면 맛과 향이 개선되는데, 나는 갓 개봉해서 달랑 한 모금 마시고서는 기대에 못 미친다고 타박한 것이다. 3만 원대 레드 와인이었다면 더 신경 써서 브리딩 했겠지.
겸연쩍은 마음으로 라벨 속 양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내가 1만 원대 와인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싶었다. 직업이 작가다 보니 또래 직장인들과 비교해 수입이 적은 편이다. 와인을 위해 여타 비용을 줄이다 보니 옷이라고는 몇 년간 제대로 사 입은 기억이 없다. 고로 행색은 수수함과 초라함의 경계를 넘나든다.
내 글이나 책을 읽은 극소수 독자가 아니고서야 누가 나를 1만 원대 와인 이상의 존재로 여기겠는가.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서는, 내가 1만 원대 와인을 대했던 방식 그대로 나에게 했다면 분명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와인아. 서로 비슷한 처지인데 서운하게 대해서 미안하구나. 다음번에 또 만난다면 꼭 정성들여 삼십 분 이상 브리딩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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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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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원대 떫은 와인, 이렇게 먹으면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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