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2월 국민의회 조직개편 소식을 보도한 1947년 2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 문일민은 노농위원(勞農委員)으로 보선됐다.
조선일보
이 무렵 문일민은 한국독립당으로 당적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충칭 시절 한독당 독재체제를 반대하며 민족혁명당·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신한민주당 등 줄곧 야당 세력으로 활동하던 문일민이 왜 갑자기 한독당으로 당적을 옮겼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추정컨대 해방 정국에서 정부 수립 문제를 놓고 김구와 한독당 노선에 공명하여 그를 따르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일민이 속해있던 신한민주당은 1946년 9월 15일 재미한족연합회·청우당·조선혁명당·신한민족당·국민당·삼우구락부 등과 연합하여 신진당(新進黨)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이들은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당시 참가를 결정했다.
그러나 김구를 비롯한 한독당 세력은 대대적인 반탁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미소공위를 철저하게 배격하는 입장이었다. 훗날 문일민은 김구의 반탁운동 및 자주적인 통일정부 수립 노선에 절대적 지지를 선언했던 만큼, 아마 이 무렵 신민당을 탈당하고 한독당에 입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탁통치 철폐를 '제2의 독립운동'으로 간주한 국민의회는 자주적인 과도정권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임시정부를 확대·강화하는 형태로 과도정권 수립을 선포했으나 미군정의 제지로 좌절됐다.
국민의회는 9월 초 제43차 임시회의를 열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이어지는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하는 입장을 채택하고 조직을 쇄신했다. 그러나 남한총선거에 찬성하면서 이승만 지지를 선언한 지청천과 국민의회의 독단적인 인사에 불만을 품은 이시영이 잇따라 국무위원직을 사퇴하면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친일파 활개치는 현실에 자결 결심
정세는 남북분단을 향해 치닫는 가운데 독립운동가들조차 정부 수립 방향을 놓고 분열하는 상황에 문일민은 답답함을 느꼈다.
문일민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이 미군정에 기생하며 애국자 행세를 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김구를 비롯하여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는 임시정부 요인들을 향해 '국제형세를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모욕하기까지 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들이 해외에서 독립운동하다 돌아온 애국지사들을 모욕하는 현실에 문일민은 기가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