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충칭 '한국광복군총사령부' 건물 내 회의실 (복원)
김경준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 입당
1944년 문일민은 다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탈당했다. 그리고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朝鮮民族革命者統一同盟)에 입당,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됐다.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아래 통일동맹)은 1943년 11월 27일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유동열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창당 직후 이들이 밝힌 당의 주요 종지(宗旨)는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전취하기 위하여 국적(國敵) 일본의 통치권을 철저히 박멸하는 동시에 국제적 침략국의 잔여세력을 구축함에 종사함.
(2) 우리는 국내 대중의 반일폭동을 격기케 함과 동시에 국외에 있는 무장운동과 배합작전을 촉진함에 전력함.
(3) 우리는 세계의 반(反) 침략부대의 일부이며 전후 평화 사자(使者)의 일원임을 자부하는 동시에 어떠한 세력을 막론하고 조선민족의 독립자유를 구속·억제하는 국가·민족과 적극 항쟁함.
(4) 위 3대 목표를 실천함에는 우선 전민족적 통일단체로서 일치 행동에 진출함에 있나니 우선 중국 충칭에 있는 혁명단체와 합당할 수 있는 것은 속히 합당 통일을 완료하는 동시에 기타의 단체와 연합이나 동맹인 통일진선을 결성함에 절대 노력함.
(5) 본 동맹은 혁명운동 각 단체에 대하여 시종 친애와 성충(誠忠)으로 민족 가정(家庭)의 대금도(大襟度: 남을 용납할 만한 도량)를 더욱이 자면(自勉: 스스로 힘쓰다)함.
(6) 우리는 본 동맹의 종지를 찬동하는 동지의 가맹을 환영함.
(7) 본 동맹은 합당통일이 성립됨을 따라 동맹체를 해소하고 통일체에 가입함.
이들은 또 결성 당시 발표한 '선언서'에서 '의형제와 같은 정감적(情感的) 결합을 버릴 것', '개인 단체만의 이해를 목표한 당파적 단결을 버릴 것', '국가·민족의 복리를 목표한 대단결을 위하여 현 단계에 처하여서는 사회주의의 계급투쟁이론으로 자민족의 민족의식을 감삭(減削)하거나 민족적 혁명역량을 분산하는 이론은 정지할 것', '무정부주의의 극자유(極自由)의 이론으로 기성세력과 조직을 부인하자는 그 이론도 정지할 것' 등을 선언하며 "오직 조선민족혁명을 사명으로 한 민족혁명자는 다 통일하자"고 부르짖었다.
문일민의 통일동맹 입당은 '혁신성'을 상실한 민혁당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걷던 민혁당은 1941년 5월 제5기 7차 중앙회의에서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이때 민혁당은 임시정부를 한국독립당 인사들이 장악한 '소수를 대표하는 정치기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임정을 확대 개조하여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지휘부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참여를 결정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42년 10월 개원한 제34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비로소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 민혁당은 야당으로서 임시정부의 확대 개조를 추진했다. 그 과정에서 당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1943년 2월 문일민이 속해 있던 조선민족당 해외전권위원회를 비롯한 군소정당들도 흡수했다.
실제로 임시정부 참여 초기 민혁당은 한독당을 상대로 강력한 대여투쟁을 전개하면서 한독당이 독자적으로 구상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수정 요구를 시작으로 한독당 일당독재나 다름없는 임시정부 체제를 개조하여 모든 항일세력이 참여할 수 있도록 임시정부의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그리고 1944년 4월 제5차 개헌으로 부주석직이 신설되면서 민혁당의 김규식이 부주석으로 임명되고 국무위원 14석 중 4석, 7부(내무·외무·군무·법무·재무·문화·선전) 부장 중 군무부장(김원봉)과 문화부장(최석순)의 지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일정 정도의 기득권을 확보한 민혁당은 이후 한독당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예전과 같은 투쟁력을 보이지 못했다. 한편으로 김원봉 중심의 당 운영에 대해 비(非) 약산계 인사들이 불만을 품고 탈당하기 시작했다. 문일민 역시 한독당 중심 체제에 대한 민혁당의 타협적 태도에 실망을 느끼고 탈당 대열에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통일동맹 창당을 주도한 유동열은 문일민이 교통부 총무과장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교통부장으로, 참모부 참모로 선임됐을 때는 참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문일민과 인연을 맺었다. 따라서 문일민의 통일동맹 입당은 유동열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후술하겠지만 이때 맺은 문일민과 유동열의 인연은 해방 후까지 이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