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리 배수갑문일본인들이 한강 가에 설치한 김포 신곡리 배수갑문. 이곳에는 지금도 갑문이 있어 이 벌판 농업용수 조절 기능을 함.
서울역사박물관
매년 홍수에 시달리는 이 벌판에 일제도 운하를 구상하나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쌀 수탈 목적으로 산미증식계획을 내세운다. 부평에 농지를 소유한 일본인 대지주 하여금 부평수리조합을 설립, 한강 물을 끌어들일 배수갑문을 김포 신곡리에 설치하고 3개 간선수로와 배수로를 뚫는다. 굴포천을 개수하고 곳곳에 제방을 쌓았으며, 부평평야를 관통하는 중앙도로를 개설한다.
1960년대에도 경인 지역 물류 수송을 위해 이곳에 운하를 검토하나 착공까지 이르진 못한다. 정작 사달은 2012년에 벌어진다. 2002년 만들어진 굴포천 방수로만으로도 홍수 예방이 충분한 곳에, 어리석은 권력자가 운하 만든답시고 수조 원을 들여 겨우 수상 스키장을 만들어 놓았으니.
군사 도시로
부평은 1930년대 후반까지 평범한 농촌이었다. 경인선 중 부평역만 전기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한미했다. 도시가 된 계기는 중일전쟁(1937)이다. 일제는 전쟁으로 중화학공업이 절실해지고, 그 거점으로 부평이 선택된다.
부평은 계양산~천마산~철마산~만월산으로 이어진 산자락이 서해를 향해 활처럼 휘어진 안쪽 분지다. 이런 지형적 특성은 북서쪽 공격으로부터 천혜의 방어막이었다. 1937~1942년까지 산곡동을 중심으로 일본의 자동차와 철강, 기계, 요업과 화학공장이 우후죽순 생겨난다. 산업단지 기반이 이때 만들어진다. 전범 기업 미쓰비시 공장 터였다가 나중 군부대로, 다시 부평공원이 된 땅이 대표적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