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종남씨가 거주하는 마을의 골목
변상철
변종남씨 고향은 강원도 고성군 죽왕면 오호리다. 그가 한국전쟁 전 북한 지역이었던 그곳을 떠나 속초에 온 지도 벌써 70년이 넘었다. 변씨는 오호리에 살 때부터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배를 타기 시작해,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도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계속 배를 타야 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변씨는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해방되던 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국전쟁의 피난길에 아버지마저 잃은 그로서는 학교에 다닐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오호리에 있으니까 북한에서는 못 살겠다 싶더라고요. 전쟁이 나자마자 아버지하고 주문진, 동해시로 해서 경주까지 피난을 갔었어요. 국군이 북진하는 바람에 고향 땅이 수복이 되어서 다시 고향 오호리로 돌아와 살다가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다시 피난을 떠나야 했죠.
그때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서 피난 내려오던 배에서 돌아가셨어요. 그때부터 저는 아무도 없는 고아처럼 살기 시작했죠. 다행히 피난길에 주문진에서 조카와 작은어머니를 만나 같이 지내기는 했지만 부모 없는 설움을 어디서 말하겠어요."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선원으로 일했고 나이가 들어 군에 다녀왔다. 제대한 후에도 특별한 기술이 없었던 그는 다시 배를 탔다. 오호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한 후, 먹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1969년경 속초시로 나왔다. 속초에서 처음 배를 탈 때는 가까운 바다에서 작업하는 자망바리(그물잡이) 선박을 주로 타다가 해부호를 소개받으면서 오징어 배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부호 선장 김재원이 집안 사돈지간이라 그 배를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해부호에서는 사무장 일까지 겸해야 했기 때문에 무척 바빴다고 한다. 선박이 출항할 때마다 필요한 선원 인력을 채우고, 조업 기간 필요한 물과 음식을 채워야 하며, 조업 후 선주와 선원들의 이익을 나누는 일도 해야 했다. 날이 좋지 않은 날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날에 바다로 나가야 했다. 매일 오후 1시나 2시 출항하기 전에 인원과 출항 장비, 물건 준비를 마쳐야 했다. 그렇게 해부호를 타면서 봄, 여름, 가을까지 오징어를 잡고, 겨울에는 명태를 잡았다.
"1971년 해부호가 납북될 당시 해부호에 나침반은 있었고 해도나 무전기는 없었어요. 그래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힘들었어요. 콤파스 밑에다가 해구도(바다의 밑바닥 지형을 그려놓은 지도) 하나 놓고 대충 항해하는 것이죠. 조업 방향은 대략 선장이 산모양이나 등대를 보고 방향을 잡죠. 동해안은 뭐가 제일 어려운가 하면 북한 수원단 쪽 등대하고 주문진 등대하고 불빛 깜빡이는 게 비슷해서 많이 헷갈려 해요."
배를 끌고 북한으로
1971년 8월에 납북되던 날 날씨가 좋지 않았다. 조업을 마치고 육지에 거의 다 들어왔을 무렵 변씨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배 뒤편으로 가 바다를 보니, 배 한 척이 불빛을 깜빡이며 쫓아오고 있었다고 한다. 변씨는 그 배가 북한 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고 한다. 새벽녘에 운해가 잔뜩 끼고 비까지 슬슬 내리던 음침한 날이었다고 한다.
조용히 따라오던 배는 어느 지점에 다다르자 기관포를 쏘아대기 시작했다. 선장은 배를 세웠고, 선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북한 함대에서 배에 줄을 묶으라며 밧줄을 던졌지만 두려움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선원 김두익의 삼촌이 나섰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관포 소리를 듣지 못했던 것이다. 다만 북한 배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배에 줄을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배에 줄을 묶자마자 곧장 배를 끌고 북한으로 넘어갔다. 대략 한 시간 정도 끌려간 곳은 북한 장전항이었다.
"북한 배가 50W 엔진을 두 개나 달고 있던 배(해부호는 10W 엔진이었다고 한다)였는데 엄청 빨랐어요. 우리 해부호는 주문진 등대를 보고 들어가던 중이었거든요. 배를 옆에 붙이는 걸 보니까 북한 배 표시가 있더라고요. 북한 배들은 브리지 밑에다가 배 번호를 쓰거든요. 우리 함대들은 선수 쪽에다 번호를 쓰기 때문에 단번에 북한 배인 줄 알겠더라고요."
북한 장전항에 도착하자 항구에 배를 대고 선원들만 내리게 한 뒤 해부호는 어디론가 끌고 갔다고 한다. 선원들이 내린 곳은 황량한 밭 같은 곳이고, 선원들은 그곳에 지어놓은 임시 막사에 들어가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해부호 선원 명부를 보며 선원 한 사람씩 불러서 조사를 마치자, 선원들은 다시 금강산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금강산 휴양소에서 사흘 머무는 동안 식사는 금강산에 있는 호텔에서 먹고, 잠은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지어놓은 나무집 같은 곳에서 잤다고 한다. 3일째 되던 날 북한 지도원들은 선원들을 금강산에 있는 온천장에 데리고 가더니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게 하고는 또다시 이동시켰다고 한다.
금강산을 출발한 일행은 원산을 거쳐 해주에서 며칠간 여관 생활을 하다가 어두운 밤을 이용해 평양, 함흥을 거쳐 백두산 아래에 해산시까지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귀환할 때까지 머물렀던 장소는 순안에 위치한 성명불상의 휴양소였다고 한다.
변씨 일행이 머물렀던 휴양소 앞에는 커다란 인공호수가 있었고, 겨울이 되면 그 호수가 꽁꽁 얼어 스케이트를 타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에 머물며 주로 했던 일은 북한의 이곳저곳을 견학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주로 신발공장이라든가 농기구 제작소, 제철소, 만경대 같은 북한에서 자랑할 만한 곳들을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로부터 개별적으로 교육을 받는다거나 특수한 임무를 받는 일 따위는 절대 없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같이 납북되어 머물던 명성호, 아야진 배, 대청도 배 선원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때 북한 배들이 남한 선박을 얼마나 잡아 왔느냐면, 잡혀 온 어선 중에 상고선(장사할 물건을 싣고 다니는 작은 배)이 있더라고요. 그 배에는 할머니 한 명, 아주머니 한 명이 있었다고요. 그 여자들은 대청도에서 인천을 나오려던 사람들이었는데, 당시에는 여객선이 귀하잖아요. 그래서 상고선을 얻어타고 대청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다가 잡힌 거라. 그래서 선원도 아닌 여성 2명이 있었다니까."
진실규명 하려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