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궁이 된 남베트남 대통령궁
Widerstand
이제 이 '동방의 파리'에 베트남인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사이공 시내에는 프랑스인들이 거주했고, 베트남인들은 시 외곽에 거주하며 허가증을 받은 이들에 한해 허락된 시간에만 시내로 들어와 각종 노동에 투입되었습니다.
곧 사이공은 해양 도시의 무역 네트워크 한 가운데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주일에 한 번 마르세유를 출발해 콜카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사이공, 마닐라, 중국, 고베, 요코하마를 잇는 정기 여객선을 띄울 정도였습니다. 사이공에서 냐짱, 꾸이년, 다낭, 하이퐁을 잇는 연안 여객선도 출항하며 베트남 곳곳의 무역망이 사이공으로 수렴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성장한 도시는 베트남을 넘어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인도차이나 전체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 기능을 한동안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프랑스가 생각했던 것처럼 메콩 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메콩 강 상류의 폭이 좁고 유속이 급해 무역선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대신 프랑스는 메콩 강에서 북부의 흐엉 강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군대를 파병해 하노이를 점령했죠. 이렇게 베트남은 셋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북부 통킹 지역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습니다. 중부 안남 지역은 응우옌 왕조가 지속되지만 사실상 프랑스가 모든 행정을 대행하는 보호국이 되었죠.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은 완전히 프랑스가 지배하는 프랑스령이 되었습니다.
한때 청나라가 여기에 불만을 품고 청불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셋으로 나뉘어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식민 상태는 1945년 2차대전 막바지까지 이어집니다. 중부에는 명목상으로 응우옌 왕조가 존속했지만, 결국 베트남은 이렇게 독립을 상실한 셈이지요.
프랑스가 시선을 북쪽으로 돌리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수도를 하노이로 옮긴 뒤에도 사이공은 경제적 성장을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팽창하고 확장된 도시는 2차대전 이후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죠. 그리고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1975년에 호치민 주석의 이름을 따 '호치민 시'가 되었습니다.
남아 있지만 또 변한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