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콰이당마오즈(快當帽子) 분교 터
독립기념관
신흥무관학교는 하사관반(3개월), 장교반(6개월), 특별훈련(1개월: 일반 韓民)으로 나뉘어 교육이 이뤄졌으며 학과와 수련목표는 학과 교육 10%, 교련 20%, 민족정신 50%, 건설 20%의 비중으로 운영됐다. 생도들은 매일 14시간(오전 7시~오후 8시) 동안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이 무렵 신흥무관학교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조선보병대 출신의 김승빈(金承彬), 중국 윈난육군강무당 출신인 배천택(裵天澤)·이범석(李範奭) 등 최신식 군사기술을 보유한 군인들이 대거 참여해 교관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재학생들은 당대 최신의 군사지식과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 무렵 하니허 분교에 입학한 이들 중에는 훗날 공산주의 혁명에 투신했던 독립운동가 김산(金山)도 있었다. 김산은 훗날 신흥무관학교 생도 시절의 생활에 대해 아래와 같이 회고한 바 있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18세에서 30세까지의 학생들이 100명 가까이 입학하였다. (…중략…) 학과는 새벽 4시에 시작하여, 취침은 저녁 9시에 하였다. 우리들은 군대전술을 공부하였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였던 것은 게릴라 전술을 위해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지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등산에 단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움을 받아야만 간신히 그들을 뒤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등에 돌을 지고 걷는 훈련을 하였다. 그래서 아무 것도 지지 않았을 때에는 아주 경쾌하게 달릴 수 있었다." - 님 웨일즈, 『아리랑』, 동녘, 2005, 131쪽.
비슷한 시기 입교한 문일민 역시 김산과 동일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간도 지역 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약
문일민은 신흥무관학교에서 혹독한 군사 교육을 수료함으로써 마침내 독립군으로 거듭났다. 이후 서간도 일대의 무장 단체들에 배속되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임무는 한족회(韓族會) 중앙본부의 특명을 받아 평양에 잠입, 애국청년회(愛國靑年會)의 연락과 조직 등을 강화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만주로 귀환했다.
귀환한 문일민은 그해 12월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했다. 대한청년단연합회는 1919년 11월~12월 사이에 안동현(安東縣)에서 안병찬(安秉瓚)·김승만(金承萬)·김시점(金時漸)·오동진(吳東振)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로 당시 만주 및 국내에 산재한 청년단체들이 서로 활동 목적이 달라 충돌할 수 있으므로 활동을 하나로 통일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졌다.
연합회는 기관지 발행을 통한 선전 활동과 함께 별동대를 두어 적(敵) 기관 파괴·주구(走狗) 토벌·군자금 모집 등에 힘썼다. 문일민 역시 별동대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