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哀-제주4.34.3 트라우마센터 프로그램에서 그린 그림
김순애
인생 哀-제주 4.3
어머님이 아파서 돌아가시는 그 광경이
머리에 떠올라서 표현해 봤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큰언니하고 밑에 오빠 또 아버지 그리고
막내동생 잃어버리고
친정으로는 외삼촌 4형제가 몰살되고 거기에 외할머니까지
어머니는 가슴에 맺힌 한 때문에 계속 한숨만 쉬시고
음식도 못 드시고 밭에 일하러 가도 전혀 못 하고
밭고랑에 누워서만 있다고 오고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는 배가 막 차차 불러 오릅디다
결국 고통만 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저예요
돌아가시는 걸 옆에서 보면서 그저 눈물만 뚝뚝 흘리고
당시에는 전기가 없어서 각짓불 불은 붙여놨지만
그래도 밤은 어두침침했습니다
동네 땅부자, 청집 삼촌 딸 영신언니
영신언니는 동네에서 많은 땅을 가진 청집 삼촌의 딸이었다. 벌을 키우고 있어 영신언니네 집은 '청집'이라고 불리웠고(청은 제주 사투리로 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신언니 아빠를 청집 삼촌이라고 불렀다.
처음부터 청집 삼촌이 부자였던 것은 아니다. 4.3으로 제주도는 피폐해졌고 많은 이들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밀항선을 탔다. 당시 청집 삼촌의 누이 넷도 일본으로 갔고 일본에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청집 삼촌에게 보내주었다. 청집 삼촌은 돈을 받을 때마다 당시 싸게 나온 동네 밭들을 샀고 본인도 알뜰하게 재산을 모아가면서 동네 주변의 많은 밭을 가지게 된 것이다.
영신 언니에게는 장애가 있는 여동생 둘이 있었다. 한 동생은 무슨 병을 앓고 있었는지 거의 걷지를 못했고 한 동생은 나이에 비해 발달이 더딘 편이었다. 많은 밭에 농사를 짓게 되면 일꾼들을 챙겨야 하는데 언니의 엄마는 두 동생을 돌보느라 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영신 언니는 나와 다르게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지만 동생들을 돌보느라 경황이 없는 엄마를 대신해서 밭일을 하러 다녀야 했기에 학교에 갈 틈이 없었다. 청집 삼촌이 일꾼을 사서 밭일을 하는 날이면 영신언니도 같이 일을 해야 했다. 보리씨를 뿌리면 바로 다음 날부터 김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풀이 올라오면 또 뽑고, 뽑고, 김매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 당시에는 농약도 없고 농기계도 없었기에 농사는 모두 손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청집 삼촌은 주로 동네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농사를 지었다. 청집 삼촌네 벌통을 산으로 옮기는 일도 동네사람들이 일당을 받고 했다. 4.3 직후 동네에는 일손이 귀했다. 동네 사람들이 일을 하는 날이면 주로 언니 할머니가 일꾼들 밥을 준비했고 큰 딸인 영신언니는 할머니를 도와 밥을 준비하고 밭일을 함께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른들 틈에 끼어 동네 아이들도 자주 영신언니네 밭에 가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영신 언니가 우리를 진두지휘했다. 영신언니네 밭에서 일을 하면 청집 삼촌은 100원과 10원 짜리로 우리에게 일당을 주었고 그러면 나는 그 돈으로 집에 필요한 것을 사곤 했다.
아픈 여동생들을 돌보느라 집안일에 소홀할 수밖에 없던 엄마를 대신해서 일해야 했던 영신 언니는 어려서부터 빨리 철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영신언니와 나 둘 다 집안의 큰딸로 어른 역할을 하며 고생했던 경험을 나눠가져서인지 우리 둘의 사이는 다른 또래들보다 더 돈독했다.
나보다 세 살 위인 영신 언니는 열일곱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씨 성을 가진 제주 사람과 결혼했다. 하지만 사업을 하던 남편은 사고로 다치고 큰 병치레를 하게 되면서 언니의 삶도 완전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남편 병구완하랴 자식들 돌보랴 삶의 풍파를 겪은 언니는 원래도 당찬 성격이었는데 일본 생활을 하면서 더 강단이 생겼다.
일 년에 한 번씩은 제주에 계신 아버지 생신 때마다 식구들을 만나러 제주를 방문했던 언니는 그때마다 잊지 않고 나를 만났다. 영신언니는 일본에서 40년을 살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자식들 모두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10대 때보다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온 언니는 80대 중반인데도 여전히 대범하면서도 활력 있는 삶을 살고 있고 나와는 지금도 언니, 동생으로 서로 의지하며 친자매 이상의 우애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