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통영극장 자리 2층에 있던 극장에 약 200여 명이 가득차 있었다.
박기철
전쟁 이전부터 보도연맹원들은 수시로 소집을 당했다. 각종 작업과 훈련, 강연 등의 명목이었는데, 소집에 늦으면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코앞에 다가오자 통영경찰서와 해군, 헌병대는 통영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한다.
7월 25일, 도천동, 태평동, 항남동 등지의 보도연맹원들은 당시 통영경찰서 건너편에 있던 봉래 극장으로 모인다. 그리고 다른 연맹원들은 통영 극장으로 소집됐다.
그런데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보도연맹원만이 아니었다. 극장에서 시국강연회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모인 일반 학생이나 시민들도 상당수였다. 당시 통영 극장 안에는 200여 명의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그날 자정 경 통영경찰서로 이송됐다. 경찰서 유치장에는 통영 전역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로 가득했다. 감금된 사람들의 가족들은 면회를 요구했고, 갇힌 사람을 빼내기 위해 뇌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한 가족은 30만 원을 주면 석방이 가능하다는 말에 급히 돈을 준비해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이미 희생된 후였다.
경찰들은 감금된 사람들을 분류한 후 다시 트럭에 태워 광도면의 무지기 고개라는 곳으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대여섯 개의 구덩이가 파여져 있었다. 경찰들은 한 구덩이에 50여 명씩 몰아넣고 총을 쐈다. 증언에 따르면 이 총살은 며칠간 계속됐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하게 확인된 것은 7월 26일과 27일 이틀뿐이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무지기 고개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급히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경찰들이 사격을 가하며 쫓아냈기에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무지기 고개에서 살해된 사람들은 110~250명이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들은 여기뿐 아니라 일부 인원들을 배에 태워 인근 바다에 수장했다. 그래서 당시 가덕도 부근 바다에서 끈에 묶인 시신이 여럿 떠다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남망산 조각 공원에서도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인근 고성 지역으로 끌려가 죽은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당시 보도연맹원에는 우익단체 간부인 국민회 통영 지부장인 박세홍도 있었다. 그리고 부지부장인 김철호도 있었는데 그는 인근 바다에 수장됐다.
이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은 회원 확보에 대한 실적 압박 때문에 경찰의 협조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통영뿐 아니라 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양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