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수씨의 아내가 물질을 해 채취한 미역.
변상철
김재수씨는 고향인 강원도 고성의 제진에 살다가, 한국전쟁 중 1.4후퇴 때 주문진으로 피난 오게 되었다. 종전 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제진이 민통선 안쪽에 포함되는 바람에 간성에 자리 잡고 살게 되었다. 어선은 군대에 가기 전부터 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60년대 간성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는 배 타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일이 많지 않았다.
김재수씨는 3대 독자라 군에서 1년 8개월 근무 후 의가사 제대를 했다. 그만큼 손이 귀한 집안이라 곱게 자랐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귀한 3대 독자라 하여도 일찍이 경제생활을 해야 했다. 누군들 3대 독자를 머나먼 바닷길로 내보내고 싶었을까.
김재수씨 아버지 역시 김씨가 처음 배를 탄다고 했을 때 먼바다가 아닌 당일에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연안 조업만 허락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돈이 되지 않았기에, 군에 다녀온 뒤로는 오징어 배를 타고 독도까지 오가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납북이 되었다.
남한으로 보내 달라
1968년 11월 납북되었던 대동호는 김재수씨가 조업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승선해 선원으로 일했던 어선이었다. 그러다가 1968년 선장 면허시험에 합격하고 곧바로 대동호 선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납북 사건은 독도 쪽으로 오징어바리를 다녀오고 나서 명태조업을 나갔다가 일어났다. 그 당시는 어선에 전자장비 없이 나침반 하나에 의존해 운항할 때라, 배의 위치는 육지에 있는 산 모양을 보고 대충 가늠했다고 한다. 납북되던 날 대동호는 육지의 산 모양으로 볼 때 제진 앞 바다 쯤이었다.
"납북되던 날 아침, 투망해 놓은 그물을 건지고 있을 때 근처에 해양경비선 무궁화호와 어선들이 보였어요. 이 배들이 주위에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조업하던 장소가 군사분계선이나 어로저지선을 넘지 않고 작업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계속 작업을 하다가 어망을 대여섯 닻쯤 인양할 때였어요. 북쪽에서 쾌속정(까질이)이 하얗게 물살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다시 주위를 살펴보니 방금까지 있던 무궁화호와 어선들이 온 데 간 데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너무 놀라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도망치려고 그물도 끊고 그대로 달렸어요. 그런데 야속하게도 기관 고장이 나 배가 서버리더라고요.
처음에 북한 배는 우리가 내빼는 것을 보고 더 따라오지 않았는데, 대동호가 서버린 걸 보더니 그 '까질이'가 다시 따라왔어요. 우리 배 옆에 까질이가 붙더니 총을 든 인민군 둘이 올라타더라고요. 그중 한 놈은 선장실 쪽으로 와서는 북한 배와 연결된 줄을 코에 걸었고, 그동안 다른 한 놈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선원 여덟 명을 '담불'(배의 화물칸)에 모아놓고 총을 겨누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 상태로 두 시간 이상 줄에 끌려갔어요(명태바리로 선원 여덟 명이면 꽤 많은 숫자다). 그렇게 끌려가 도착한 곳은 남애리라는 곳이었어요. 거기서 식사를 하고 하룻밤을 묵고는 다음 날 바로 평양으로 이동했어요. 평양에 도착해 보니, 우리처럼 잡힌 배가 열한 척쯤 되더라고요."
김씨를 비롯한 선원들은 평양에 억류되는 동안 '남한으로 보내 달라'고 단식투쟁도 벌이며 항의했다고 한다. 그러자 북한 관리자들은 그곳에 있던 열한 명의 선장을 별도의 여관에 수용하여 남한으로 돌아올 때까지 다른 선원들과는 격리시켜버리는 조치를 단행했다고 한다.
선장들은 두 명씩 한방을 썼는데, 김씨는 경북에서 거진으로 '남바리'(명태, 오징어, 꽁치 따위의 회유에 따라 항구를 정해 놓고 며칠씩 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가는 일) 왔다가 잡히게 된 선장 고명동씨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북한 당국은 '좋은데'라며 만경대, 대동강 등을 구경시키기도 하고, 트랙터 공장과 비료공장 같은 곳을 데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북한에서 포로 같은 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지도원들로부터 '내일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중에 귀환 소식을 들어서 너무도 기뻤지만, 혹시라도 갑자기 그들 마음이 바뀔까 봐 기쁜 내색을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1968년 5월 29일, 귀환하기 위해 남애리로 이동하자, 그곳에 납북 초기 헤어진 선원들(대동호 선원을 포함한 열한 척 배의 선원들)이 있었다. 아침을 먹고 선원들은 각자 자기 배에 올라탔다. 붙잡힐 때 대동호의 엔진이 고장 나 있었기 때문에 내심 걱정했는데, 정작 배에 오르고 보니 엔진이 수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시 붙들려갈지 모른다는 공포감
북한 함정의 호위로 열한 척의 배들이 드디어 남쪽으로 출발했다. 마음은 이미 남쪽에 가 있어 최대한 속력을 내었고, 그렇게 한 시간 반 정도 달려 군사분계선에 도착했다. 군사분계선 근처에 도착하니 납북될 때 보이지 않던 남한의 해군 함정이 납북 어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귀환한 열두 척의 배들은 남한 함정을 따라 거진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배에서 내려 곧장 호송 차량을 타고 고성경찰서로 이동했다. 백여 명이 넘는 선원들이 고성경찰서 유치장에 다 들어갈 수 없어 교육청 건물 등 다른 곳으로 분산 수용되었다고 한다.
인원이 많아 조사받을 때는 어딘가로 불려가는 선원들도 있었지만, 김씨는 경찰서 내의 두세 평 되는 조사실로 갔다. 조사실에 들어가면 수사관들이 대여섯 명 있었는데 소속이 해군, 정보부, 경찰 등 전부 다른 것 같았다고 한다.
"수사관들이 서류를 미리 꾸며서 와서 조서 내용대로 자백하지 않으면 구타를 해요. 구타를 하면서 하는 말이 '자기들이 하자는 대로 하면 형을 감형시켜주겠다. 적게 받게 해주겠다' 이런 감언이설까지 하면서 구타를 했어요. 조사받을 때 우리를 수사했던 사람들은 경찰만 있는 게 아니라 해군, 정보대도 왔고 경찰형사들도 왔어요. 조사실에 들어가면 대여섯 명이 나를 가운데 놔두고 이쪽에서 '욱', 저쪽에서 '욱'하고 때리니까 떨려서 무슨 조서를 받았는지도 몰라요. 발로 막 차고 손으로도 구타했어요.
조사는 다른 곳에 가서 받은 사람도 있는데 나는 경찰서 안에 있는 조사실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조사실 크기는 두 세평 정도 크기였어요. 조사받으러 들어가면 수사관들 대여섯 명이 있었는데 아까 말한 대로 소속이 전부 달랐어요. 해군들은 해군 옷을 입고 왔더라고요. 그리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소리를 보니 소속을 다르다는 걸 알겠더라고."
고성경찰서에서의 조사는 약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이어졌고, 조사가 끝난 뒤에는 배별로 각자의 선적지로 이동했다. 당시 조사가 끝난 뒤 선장들만 구속되었고, 김씨는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된 채 검찰과 법원을 오가며 검찰 조사와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속초검찰청에서는 경찰서에서 꾸민 조서를 가져와 인정하느냐고 형식적으로 물었고 김씨 또한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경찰 조사받을 때 '여기서 인정한 내용을 어디 가서 부정하는 날에는 다시 끌려오게 될' 것이라는 경찰의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다시 붙들려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잡혔었다고 한다.
김씨는 결국 법원에서 실형 1년을 판결 받았다. 춘천교도소에서 3~4개월 수감되어 있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되어 그곳에서 출소하였다.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있는 동안 병보석으로 2~3개월 나와 있었기 때문에 김씨는 다른 사람들이 출소한 뒤에도 한동안 대전교도소에 더 구속되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무거운 마음을 항상 가슴 속 깊이 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