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혜 작가
에코오롯
- 제주에서 미술치료사와 생태예술가로 활동 중이신데 어떤 계기로 이 직업을 선택하셨는지 궁금해요.
"가족과 캐나다로 이민 가서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어요. 그곳의 광활한 자연에서 한없이 작아지면서 동시에 한없이 커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요. 캐나다에서 미술과 미술사를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뉴미디어 전문 미술관에서 기획자로 일했습니다.
2년 반쯤 일하다 첨단 기술을 이용한 소통 방식보다 좀 더 근원적인 치유와 소통의 길을 걷고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 치료를 공부했어요. 미국 공인 미술치료사가 되어 시카고의 정신병원과 청소년 치료센터에서 일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예술을 통해 스스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았고, 예술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제주에 자리를 잡게 되었구요."
- 자연에서 한없이 작아지면서 동시에 한없이 커진 경험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이민자가 많은 공립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좋은 선생님들을 여럿 만났어요. 생활 속 우리 행동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한다든가, 직접 가르치기보다 경험을 통해 깨닫게 하는 방식으로요.
당시 교회 목사님 지도로 토론토 북쪽의 광활한 호수에 있는 섬에 카누를 타고 들어가서 3박 4일 캠핑을 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음식을 담당했던 누군가가 짐을 놓고 와서 섬에서는 약간의 간식 외엔 먹을 게 없었는데요. 배고픈 상황에서 날이 저물고, 그 깜깜하고 고요한 섬에서 하늘 가득 별과 그 별이 비친 호수 표면을 바라보자니 마치 제가 우주 속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감수성 예민한 시기여서인지 그 장면 속에서 나는 죽어야겠다고도 느꼈고요.
돌아보면 자연의 아름다움, 경외심, 숭고의 경험이었습니다. 나보다 절대적으로 큰 공간의 경험, 그 안에서 나는 아주 작은 존재이지만 또 그 웅장함을 닮은 큰 존재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랄까요. 이민 가서 언어가 잘 안 되고 소통이 어려웠던 시기에 그런 경험이 저에게 영향을 주었죠."
- 제주에서는 미술치료를 하다가 생태예술 분야의 작업도 하게 된 것인가요? 두 개의 작업이 어떻게 연결될까요?
"미술 치료할 때 내담자에게 집중해서 상담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저 자신이 힘들고 우울해지곤 했어요. 피곤함도 있었고요. 그럴 때마다 제주의 숲, 바다… 자연 속으로 들어가면 숨을 쉴 수 있었어요. 저를 충전하는 시간이었죠.
그러다 나중엔 내담자를 데리고 숲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문을 열고 숲으로 간다'라고 이름 붙이고, 자연에 들어가서 하는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했어요. 가져간 물건을 숲에 남겨두지 않고, 숲속의 자연물을 가져가지 않는 규칙을 세워서요. 사람들이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미술치료라면, 생태예술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는 작업이고요. 겹치는 부분이 많아요."
- 통상 미술치료는 심리학과 연결될 텐데, 심리학에서는 닫혀 있는 내밀한 공간에서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과정이지요? 그런 면에서 '문을 열고 숲으로 간다'는 작업은 미술 치료에 있어 관점의 전환을 담고 있는 듯하네요.
"맞아요. 제가 배운 것은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작업인데, 실제 내담자를 만나 미술치료를 하면서 깨달은 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면 안으로 계속해서 들어가는 방식은 끝이 없더라고요.
내담자들이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삶을) 살지 않으려는 것도 있고요. 치료 중에는 진짜 삶을 살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친구를 사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요.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내면 안으로 들어가고 분석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자연에 드는 것은 마음의 문제를 안으로 파고들어 해결하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의 크기가 달라지는' 경험이에요. 내 마음에 문제가 생겼고 상처가 있고 아플 수 있지만, 웃을 수 있고 살 수 있다는 깨달음이요. 함께 할 수 있다는 열림이지요. 자연에 들어 나의 문제를 바라보면 나라는 인간이 겪는 고통이 전 지구적 맥락에서는 별게 아니라는 인식이 듭니다. 이해하고 파악하고 분석하는 게 아니라 열리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깨달았어요."
바닷가에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줍기 시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