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0월 25일, 중앙청 청사에서 할복 후 쓰러져 있는 문일민
동아일보
언론들은 앞다투어 이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8.15 이후 3년이 되도록 조국의 독립은 안되고 외국인에게 아첨하는 폐풍은 날로 격심해가는 현상에 의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군정청에 가서 군정직원들에게 보아라 하듯이 배를 가르고 자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어제 25일 오전 11시 45분, 중앙청 2층 식당 앞 우편측 통로상에서 국민의회 대의원 문일민씨는 면도칼에 손수건을 감아들고 하복부를 5촌(16.5cm - 옮긴이 주) 가량이나 가르고 자결하였는데 절명은 되지 않았으며 피투성이가 된 가슴 위에는 '문일민 유서(文一民遺書)'라고 쓴 글발을 남기고 '나는 조선독립이 안되어서 죽는다'고 가쁜 숨결로 부르짖고 있었다." - '外人 아첨에 痛憤코 文一民氏 中央廳서 割腹', <독립신보>, 1947.10.26.
보도가 나가자 원로 독립투사의 희생에 감격한 시민들이 그가 입원한 적십자병원을 찾아와 수혈(輸血)을 자청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수혈 덕분에 문일민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그에게 담당 의사가 할복한 이유를 묻자 문일민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한국 독립"
그는 왜 해방된 조국에서 또 다시 독립을 부르짖었을까. 스스로의 배를 가르면서까지 호소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리는 문일민의 생애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이제부터 시작될 이야기는 한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해 분투했던, 그러나 역사의 그림자로 가려진 채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한 사내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일민을 아시나요?
문일민의 삶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문일민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20년 8월 3일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 폭탄대 소속으로 일제 식민통치기구였던 평남도청에 폭탄을 던져 일제를 놀라게 했다.
1925년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의 탄핵을 주도했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正義府)에서 독립군을 양성했다.
1930년대에는 흥사단(興士團)·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한국군인회(韓國軍人會) 등 여러 단체에 관계하며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가 정처 없이 방랑할 때에는 그를 따라 상하이-항저우(杭州)-난징(南京)-충칭 등을 옮겨다니며 해방 직전까지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해방을 맞아 환국한 문일민은 조국이 남과 북으로 나뉜 채 군정 아래 놓인 현실을 개탄하며 1947년 10월 25일 중앙청에서 할복 의거를 결행했다. 이러한 공로들을 인정 받아 문일민은 1962년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건국훈장 독립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