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신군부는 철권통치로 민중을 억압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발생했다. 군사정권의 붕괴는 힘이 아닌 양심과 진실에 의해서였다. (박군 고문치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는 정의구현사제단)
정의구현사제단
그레고리오 신학대학교에서 교부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면서 74년부터 신학교에서 강의도 했어요. 74년 1월 긴급조치 1호가 난 그해 5월에 수유리 한신대학은 데모로 폐교 직전까지 갔어요.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축제 준비를 하길래 제가 그랬어요. 내가 이 학교를 나와 사제가 됐지만 여러분에게 강의를 하고 공부하는 게 부끄럽다고. 그래서 신학생들이 시위를 했습니다. (주석 2)
함세웅은 불의의 시대에 정의를 위한 저항은 곧 하느님의 뜻으로 새겼다. 그즈음 중앙정보부가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를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970년대 원주는 천주교 원주교구와 사회운동가 장일순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면서 민주화의 열기가 넘쳐흘렀다. 정부는 지 주교를 불온단체라는 민청학련(전국 민주청년학생 총연맹)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천주교 신자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분노했다.
지 주교는 1974년 7월 23일 중앙정보부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김수환 추기경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본인은 양심과 하느님의 정의가 허용하지 않으므로 소환에 불응한다. 본인은 분명히 말해 두지만 본인에 대한 소위 비상 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라고 하면서 5개 항목으로 유신체제와 비상군법회의의 불법과 부당성, 무효를 주장했다.
계엄령과 같은 긴급조치 상황에서 중앙정보부의 소환을 거부하면서 유신체제를 원천적으로 비판한 것은 지 주교가 처음이었다. 그가 행한 '양심선언'은 이후 권력과 압제에 맞서는 시민들의 저항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수많은 민주인사가 '양심선언'을 하면서 독재와 싸웠다.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게 된 배경을 함세웅은 이렇게 말한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응암동성당에 있을 때였습니다. 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김포공항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철권통치에 대해 신학적 고민을 거듭하던 제 또래의 서울 원주, 인천지역 사제 30여 명이 7월 9일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갔습니다. 지 주교 납치에 대한 저희의 고뇌와 울분을 전하고 교회의 행동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하였습니다. 추기경님은 저희 말씀을 묵묵히 들으시는데, 가만히 보니 눈가에 눈물이 보였습니다.
이튿날 명동성당에서 주교님들이 미사를 올리기로 했는데, 박정희 대통령과 김 추기경의 회동이 이뤄져 추기경님은 청와대로 가시고, 윤공희 대주교님이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대를 고민하는 사제들의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주석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