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중 대주교 등 대주교와 주교 6명, 사제 926명 등 총3,951명이 참여한 '검찰개혁을 촉구하는 천주교 사제, 수도자 3,951인 선언' 기자회견이 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앞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주관으로 열렸다. 참가자들은 '숱한 희생과 헌신 끝에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가 또다시 갈림길에 놓였다'며 검찰을 향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서 참회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또한 언론을 향해 '거짓뉴스로 시민들의 영혼이 하루하루 병들어 가고 있다'며 '진실을 격려하고 거짓을 꾸짖는 본래의 사명을 회복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사법부를 향해서는 '재판관 사찰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부 구성원들은 뚜렷한 이의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며 '사법부의 권위와 존엄 회복'을 촉구했다.
권우성
한국사회에 오래된 하나의 가치관이 형성돼 있다. '긍정적 마인드'가 그것이다.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많이 적용된다고 한다. 비판이나 반대하지 않고 순종하겠다는 뜻이 담긴다. 이와 달리 '부정적 마인드'는 탈락의 대상이 된다. 이같은 현상은 회사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을 평가할 때도 '긍정적'은 높게 쓰인다.
과연 옳은 가치관일까.
진리의 길에 이르는 방식인 정-반-합의 변증법이론이 아니더라도 세상사의 이치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이어야만 할까.
우리 선대들은 유능한 청소년을 "품행이 방정(方正)하고"라고 평가하였다. 해방 후 초등학교 우수상장에도 쓰인 말이다. '방정'이란 "언행이 바르고 의젓하고 점잖음"(국어사전)이라 표기한다. 방정의 방(方)은 사각형의 모가 난다는 뜻으로 순종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가 나는 비판ㆍ합리형의 인물보다 둥근 순종형을 선호한다. 한마디로 부려먹기가 수월하기 때문이다. 일제와 독재자들이 원했던 인간형이 뇌파 깊숙이 각인되어온 것이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장 프랑수아 칸은 생애를 두고 <인류역사를 진전시킨 신념과 용기의 외침 NO!>란 방대한 저술을 통해 테베에서 천안문까지 역사상의 주요한 반항ㆍ저항사건(인물)을 제시하였다. 노예제도에 대해 '노', 봉건제도에 대해 '노', 드레퓌스파의 고귀한 '노' 등 30여 가지 사건의 '노'에 관해 쓰면서 "그들의 용감한 외침이야말로 우리의 무사안일과 순응주의를 깨뜨리는 쇠망치다!"라고 덧붙인다.
우리 근현대사를 훑어보자.
일본제국주의 '노'(3ㆍ1혁명), 이승만독재 '노'(4월혁명), 박정희 유신독재 '노'(10ㆍ26거사), 전두환 살인마 '노'(광주민주화운동), 군부독재 '노'(6월항쟁), 이명박근혜 국정농단 '노'(촛불시위) 등 비판ㆍ반대의 역정이 민주화의 마그마 역할을 하였다.
물론 '긍정적' 인식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파', 이승만 시대의 '만송족', 박정희 시대의 '유신파 지식인들', 전두환 시대의 '싹쓸이파'와 '우리가 남이가' 군상 등 사대ㆍ어용세력이 극성이었고, 그들이 당대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발호하였다. '긍정적 가치관'이 토착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사물(사안)에 대해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의 흑백선택이 아닌, 얼마만큼 합리적이냐가 기준이 돼야 한다. 인류가 중세 암흑기를 거쳐 근대에 이를 수 있었던 요인은 합리주의 가치관이다. 과학주의라고 해도 무방한 합리주의 정신은 개인의 평가에서도 기준이 돼야 함은 물론이다.
느닷없이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은, 지인들과의 사적 모임에서 근황을 묻길래 "함세웅신부님 평전을 준비 중"이라 했더니, 어느 교수 출신 인사 왈 "아, 그 반대로 일관하신 분 말이죠." 하는 것이다.
진정한 반대자의 외침은 역류하는 역사의 물굽이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시대정신의 건강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프랑스 대혁명기 그레구아르 사제는 노예해방을 지지하고 제1집정관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1756년 출생해 24세에 사제서품을 받고 혁명초기 3부회에 성직자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는 구체제의 3계급 즉 귀족ㆍ성직자ㆍ평민이 따로 모이는 것에 반대했다. 진정한 혁명은 계급타파에 있는데, 여전히 계급이 따로 모인다는 것은 혁명정신의 훼손이라며 최초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국민의회 의원이 되어서는 왕정복구에 반대하며 공화제를 주장했다.
그가 1831년 사망했을 때 파리의 주교는 종부성사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기독교식 매장도 금지시켰다. 진정한 크리스천으로 사제였던 그레구아르는 기독교식으로 죽을 권리마저 금지 당했으나 프랑스혁명사 등 역사는 불의ㆍ부당함에 치열하게 저항한 거룩한 사제로 기록한다. 실제로 그는 미국의 링컨보다 훨씬 앞서 노예해방을 실천하고 프랑스 어느 지식인ㆍ성직자보다 가장 앞서 나폴레옹의 황제등극을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