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격포 공격을 가하는 한국군 조형물 동락전승비 근처에 있으며, 실제 당시 박격포 공격을 시작했던 자리에 만들어졌다. 강 건너편에는 동락리와 동락초등학교가 있다.
박기철
6사단은 인민군과 교전을 펼치기 전 전투에 위협이 될 만한 상황을 사전에 정리했다. 그것은 좌익 성향 민간인, 즉 보도연맹원의 대량 학살이었다. 여러 증거와 증언, 연구 결과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되듯이 보도연맹 가입자가 모두 좌익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
보도연맹은 최초에 좌익 경력을 용서해주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포용하겠다며 만든 단체였다. 보도연맹이라는 단체명도 국민은 '보호'하고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뜻으로 지었다. 그런데 이는 이승만 대통령의 넓은 아량을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행정 관료들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가입자를 확보하기 위해 기를 썼다.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2003)의 초반 장면에도 이은주가 보리쌀 한 되를 준다고 해서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장면이 나온다. 이처럼 당시 보도연맹원 모집은 그 본질보다는 더 많은 인원수를 채우기 위한 충성 경쟁이었다.
충주경찰서 동량지서에서는 보도연맹원들에게 신분증과 수첩 등을 배포했다. 그런데 이때 실제로 좌익활동을 했던 사람의 신분증에는 지서 도장을 거꾸로 찍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신분증에는 도장을 바르게 찍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본다면 보도연맹원을 모집하고 관리했던 관련 당국 역시 모든 보도연맹원이 좌익 사상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그 가입 경로가 어찌되었든 보도연맹원은 모두 위협요소로 간주되어 정리 대상이 되었다. 충주에서 전투를 펼쳤던 6사단 역시 지역 내 보도연맹원을 소집한다.
동락전투가 있기 직전인 7월 3일에서 5일 사이에 6사단 7연대 헌병은 충주경찰서에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고 명령한다. 이에 따라 각 면 단위로 소집이 이루어졌지만, 일부 면에서는 소집이 진행되지 않기도 했다. 보도연맹원 소집이 가장 많이 이루어진 곳은 살미면이었다. 쌀 2되씩을 가지고 모이라는 명령에 70~80명의 사람들이 살미면사무소 마당으로 모였다. 그리고 이들은 곧 충주경찰서로 이송되어 구금되었다.
당시 충주에는 춘천, 원주 등지에서 이송된 보도연맹원들도 있었다. 이렇게 모인 보도연맹원들은 ABC 세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급은 바로 처형할 사람들이었고, C급은 풀려날 사람들, 그리고 B급은 그 중간으로 재분류가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분류는 6사단 헌병대를 비롯한 지휘부 참모 장교들이 맡았다. 그리고 이들은 보도연맹원들을 타지로 이송하지 않고 이곳에서 '종결'하기로 합의한다.
최종적으로 A급으로 분류된 인원들은 6사단 7연대 헌병에 의해 학살당한다. 대표적인 학살 장소는 싸리고개 일대였다. 증언에 따르면, 헌병들이 트럭에 사람들을 싣고 와서 싸리고개로 올라가 대여섯 개의 구덩이를 파고 총살했다고 한다.
현재 싸리고개 학살현장은 건국대학교 글로컬 캠퍼스 후문 건너편의 야트막한 야산 일대이다. 또한 싸리고개 외에도 수안보 등지에서도 학살이 이루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충주지역 민간인 희생자는 총 19명이다. 하지만 목격자들에 따르면 당시 싸리골 구덩이에만 100여 구 이상의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자는 희생자가 73명이라고 했다.
이렇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와 차이가 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진실규명 조사가 신청자에 한해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례로 충주시 엄정면은 좌익 세력이 강했던 곳이었기 때문에 보도연맹 가입자 역시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기간 중 이곳에서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람은 없었다.
이는 수십 년 간 유족들을 억눌러왔던 빨갱이라는 강력한 굴레 때문에 진실규명 신청을 회피한 것이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신청할 유족조차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일가족이나 마을 전체가 희생당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민간인들 중에는 갓난아기부터 일가족 전체가 희생당한 경우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