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개 몰리
노일영
우리 마을에는 푸들, 치와와, 몰티즈, 퍼그 같은 소형견에서부터 불도그, 시베리안 허스키, 맬러뮤트, 사모예드 같은 대형견들까지 있어서 늘 애견대회가 열리고 있는 듯하다. 몇몇 대형견들의 경우에는 논밭의 작물들을 산짐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복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건이 열악한 상황이다.
아무튼 이국적 혈통을 지닌 이 개들이 가끔 대탈주를 감행하는 덕분에 동네의 곳곳에서 열정의 열매들이라고 할 수 있는 동서 문화 융합의 결과물들이 탄생한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천진난만한 시골 개의 얼굴 위에 뭔가 이국적인 표정과 미소를 지닌 아름다운 생명체들이 우리 마을에 등장하는 것이다.
소평댁
"그런데 아줌마, 타작마당 뒤에 있는 합천댁 논에다 농로 포장해주기로 했다면서요? 그거 제가 못 한다고 합천댁 아줌마한테 얘기했어요."
"고기 무신 지랄맺은 소리고? 내가 해준다 캤는데. 내가 니 이장 맨들라꼬 얼매나 똥줄이 빠지게 뛰댕깃노. 그란데 고거를 하나 몬 한다꼬?"
"아줌마가 이번 선거에서 많이 도와주신 건 잘 알지만, 농로 포장 같은 건 공적인 사업이라 제가 처리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고, 더구나 아줌마가 약속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이노무 가시나가 알고 보이까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짐승 새끼였고만. 오야(오냐) 니가 내를 이래 웃사꺼리(웃음거리)로 맨들어 노코 이장질 제대로 할란가 어데 한번 두고 보라꼬. 니가 변사또라꼬 내가 온 데로 댕기매 나발을 불고 댕기뿔 끼이까네."
자신이 국회의원이라도 된 것처럼 온갖 약속을 남발하고 다니는 소평댁을 정리해야 했다. 이장 선거가 끝나고 남편은 조직국장을 맡았던 소평댁을 버려야 마을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한 바 있다. 순박한 웃음을 지닌 소평댁에게 매정하게 말한 것은 마음 아팠지만, 이 순간이 지나고 언젠가는 화해의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이장 회의 서류를 건네받은 우 이사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선거 때 자문위원을 맡았던 우 이사는 우리 선거 캠프가 유언비어 살포 같은 꼼수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 준 역할을 했다. 사실 우 이사의 올바른 판단 덕분에 우리 쪽의 선거 운동이 바른길을 걸을 수 있었다.
우 이사는 동물도 기르지 않았고, 보조사업이나 지원사업에도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집에는 그 흔한 보일러도 없었다. 6평짜리 컨테이너에다 세간붙이를 늘어놓았으니 보일러가 없는 것도 당연했다. 우 이사는 여름에는 선풍기 하나, 겨울에는 온풍기 하나로 함양의 기후에 순응하고 살았다.
얼핏 보면 세속을 초월한 도인처럼 보이지만, 우 이사에게는 다른 속사정이 있었다. 우 이사의 아내는 산골 마을 출신인데, 절대로 시골로 낙향하려고 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 대형 마트와 수영장이 꼭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골의 살림살이에 대해 워낙 빠삭하게 잘 알고 있었기에, 다시 어릴 적의 고생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게 결정적 이유였다.
홀아비
우 이사가 농막에 가까운 컨테이너를 치우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겠다고 한 지 벌써 5년이 흘렀다. 봄이면 씨앗을 뿌렸고, 여름이면 꽃이 폈고, 가을이면 풍년 되었지만, 우 이사는 겨울이면 행복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님이 옆에 없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