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怒: 제주 4.3'4.3트라우마센터에서 미술치료를 받으며 그린 그림과 그에 대한 해설글
4.3트라우마센터
인생 怒: 제주 4.3
저는 4.3을 표현 안 하려고 해요
왜냐하면 너무 치욕적이었기 때문에
자녀들 앞에서도 일절 안 꺼내요
그것이 잘못인 줄 알면서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마음이 너무 아프니까 분노는 그래서 어두운 색을 칠했고
밑에는 두 주먹 꾹 쥐고 인내하는 모습을 그려봤습니다.
분노
4.3에 대해 표현할 수 없는 그 서러움들이 많으니까
누구한테 얘기를 전혀 못 하고
자식들한테도 아무 얘기도 못 했어요
나 혼자 이렇게 먹구름 낀 마음으로 슬픔을 껴안고
여기까지 견뎌온 거를 표현한 거예요
자녀들과 맞대 앉아서 말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나중에 글로 한번 써서 전해줘야겠습니다.
(2021 4.3트라우마센터 예술치유프로그램 작품집 2에 실린 글과 그림)
우리 가족이 두 번째 피난을 떠난 것은 외할머니 죽음 이후였다. 특히 나의 고종사촌이 집으로 자주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분위기가 너무 흉흉하니 산으로 가자고 여러 번 설득했던 기억이 난다. 제주도에 11월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마을 사람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지목을 받으면 언제 어디로 끌려갈지 혹은 죽음을 당할지 모르게 되었다. 게다가 우리 집은 이미 외가 쪽이 빨갱이 집안으로 찍혔기에 어떤 수난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통령령 제31호
제주도지구 계엄선포에 관한 건
제주도의 반란을 급속히 진정하기 위하여 동 지구를 합위(合圍)지경으로 정하고 본령(本令) 공포일로부터 계엄을 시행할 것을 선포한다.
계엄사령관은 제주도 주둔육군 제9연대장으로 한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 279, 제주4 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고종사촌은 '언제 잡혀갈지도 죽을지도 모르는 여기서 공포에 떨면서 사느니 산으로 올라가자. 산에 가면 산사람들이 지어놓은 집도 있고 먹을 것도 배급을 해준다. 여기보다 훨씬 살기가 나을 것'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막내와 병약한 아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피난길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한동안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고심 끝에 결국 피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우리 가족은 집에서 키우는 말과 소를 끌고 막내 동생을 등에 업고 산으로 올라갔다.
산으로 올라간 우리 가족... 오빠와 막내는 결국 죽고
지금 떠올려봐도 너무나 고통스러운 피난길이었다. 사촌이 말한 대로 산에 올라갔지만 우리가 살 집이 마련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가 머물 적당한 동굴을 찾아 짐을 풀었다. 산사람들이 조 같은 식량을 나눠주면 제대로 요리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삶아서 먹었다. 어린 아이들이 그것을 그대로 먹고 변비에 걸렸다. 똥구멍으로 나오지 못한 똥으로 아파하는 아이들의 울음 소리가 동굴에 퍼졌다. 동굴 속에서 마주한 추위와 배고픔도 문제였지만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총소리, 언제 어떻게 토벌대들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공포와 두려움이 사실 더욱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다. 총소리가 잠잠해질 무렵이면 오빠와 언니가 나가서 토벌대의 눈을 피해서 물을 길어왔고 그 물로 간신히 우리 가족들은 목마름을 달랬다.
당시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유재흥씨 증언
제주도에 가보니까 산중에 피난민 2만 명 정도가 있었어. 그리고 바닷가에는 경찰 군인이, 산쪽에는 공비하고 피난민이 있는 등 서로 갈라져 있으면서 밤이 되면 욕하고 싸우는 상황이었어. 그래서 나는 '군인은 무조건 산으로 올라가라, 공비토벌 해야 한다'며 3개 대대와 1개의 유격대대 등 4개 대대를 한라산 중복지역으로 이동시켰어. 처음에는 각기 전투지역이 있으니까 각 대대가 다니면서 소탕을 했고, 마지막에는 내가 4개 대대를 기동시키면서 작전을 했지.(같은 책 p. 279)
하지만 지난회에서 이야기했듯이 토벌대들이 점점 가까이서 우리를 옥죄여 오는 가운데 막내 동생은 동굴 안에서 싸늘하게 시체로 변했고 다른 동굴로 옮기는 중에 큰 오빠는 토벌대의 총에 맞아 피범벅이 된 채 죽음을 맞이했다. 아들과 막내를 잃은 아버지는 자수를 택했고, 자수의 결과는 혹독한 고문과 언니의 형무소행으로 이어졌다. 산에 계속 남아 있기로 선택했다고 해서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토벌대에게 끌려 내려오거나 그들의 총구에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니는 당시 산에서 내려와 주정공장에서 취조를 당한 수많은 사람들처럼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는 이유로 아직 스물도 채 안된 열아홉 나이에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 당시 언니는 옆 동네 다랑곳 마을의 사람과 혼인을 약속한 상태였다. 나중에 확인을 해보니 언니의 약혼자였던 사람도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했다.
몸이 약한 엄마를 대신해서 우리 집의 살림을 도맡았었던 언니는 나와 우리 형제들에게는 엄마보다 더 의지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토록 나에게는 큰 우산이었던 언니가 갑자기 죄인이 되어서 육지 형무소로 끌려갔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내가 붙잡고 의지했던 큰 기둥 하나가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사라졌다고 해서 나까지 무너질 수는 없었다. 열 살을 갓 넘긴 내가 언니의 역할을 이어서 감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