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암 손병희 선생3.1혁명을 실질적으로 엮어내고 주도한 천도교 3세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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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명문 보성학원의 문을 닫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1907년 12월 21일 보성학원을 천도교에서 인수하였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인수한 것이지만 보성전문학생 중에는 특정 종교재단에서 인수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손병희는 학교에서 일체의 종교적 색채를 강요하지 말 것을 담당자들에게 각별히 당부하였다. 그때 손병희가 보성학원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고려대학은 교정 한 구석에 손병희의 동상을 세웠다.
박동완이 입학하기 전 배재학당은 학생들의 자치기구로서 협성회(協誠會)를 조직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의 강의에 자극을 받은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898년에는 회원이 300명까지 늘었다고 한다.
초기회장에 양흥국, 부회장에 노병선, 서기에 이승만이었으며, 그 뒤 이익채ㆍ유영석ㆍ이승만ㆍ한치유 등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았다. 회원들은 자주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주제는 자주독립ㆍ자유민권ㆍ자강개혁 등이었다. 5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된 토론회에는 일반 시민도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다른 사회단체와 지방에도 영향을 끼쳐 토론이 대중화ㆍ다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협성회는 토론의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 기관지 <협성회보>를 발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