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원 당시 제중원(1885)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홍영식 가옥(현 헌법재판소)에서 개원한 제중원의 1885년 당시 모습.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정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이 보여준 치료 효과와 그의 병원 설립 제안이 촉매제로 작용한 건 사실이다. 여기에 정변 때 목숨을 잃은 홍영식의 2천㎡ 규모 가옥(현 헌법재판소)이 사용 가능했다는 물적 기반도 한몫한다. 알렌은 헌신적으로 일한다. 1887년부터 제중원 의사들은 50원의 월봉을 받게 된다.
조선은 서양의료기관 운영 능력은 물론 의학교육에 필요한 인재와 재정마저 부족하다. 관리주체인 외아문(外衙門)은 부득이 제중원 운영을 제3자에게 맡겨야 하는 처지다. 이에 자연스럽게 알렌 중심의 북장로 선교회가 제중원 '운영권'을 맡게 된다. 조선 정부는 제중원에 매년 약 3천 원의 운영비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설립 1년 후 825㎡를 확장하여 의학당을 짓고 학생 16명을 입학시키나, 끝내 졸업생은 배출하지 못한다. 그해 7월 2차 확장을 통해 '여성전용병동'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는 모두 북장로회 요청에 의한 것으로, 확장 비용으로 3천 원이 소요되었다. 이때 이르러 제중원은 2850㎡의 완성형 서양의료기관으로 면모를 갖춰 나간다. 하지만 불과 한 달 뒤인 8월, 의아한 일이 벌어진다.
알렌이 후보지로 남별궁 터를 지목하며, 갑자기 병원 이전을 요구한 것이다. 여러 이유를 들었으나, 민중을 진료하기에 북촌 재동은 부적합하다는 명분이다. 고종은 남별궁 터 요구를 거부하고, 대신 구리개(구 외환은행 본점)에 병원 터를 마련해 준다.
터는 약 6천㎡(최대 16.6천㎡)에 이른 것으로 추정한다. 1887년 초 구리개로 제중원 이전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1894년까지 제중원 운영은 원활하지 못해 사실상 약국 수준에 불과하다. 설상가상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침범(갑오왜란)을 기화로, 소유권에 위협을 느낀 조선 정부(내아문(內衙門))는 '관리권'마저 북장로회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그러함에도 병원과 의학교육 기능은 1897년에 이르러서야 가까스로 복원된다. 1902년 알렌이 제중원 '소유권'을 얻으려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를 보면 북장로회는 처음부터 제중원을 선교회 부속병원으로 삼으려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북장로회는 다른 활로를 모색한다. 미국 대부호 세브란스로부터 거액을 기증받아, 숭례문 밖 복숭아골(서울역 앞)에 1904년 세브란스병원을 신축한다. 제중원 의료진과 의료기구, 의료기록 등이 새로 지은 병원으로 옮겨간다. 1년 후 북장로회는 약정서 체결을 통해, 구리개 제중원을 정부에 반환한다.
관립으로 세워진 여러 의료기관
1895년 11월 '종두의(種痘醫)양성소규정'이 공포되어 서양의학에 근거를 둔 전문 교육기관 종두의양성소가 생겨난다. 1개월 단기 과정이나, 졸업하여 의적(醫籍)에 등록되면 전국 종두소에 파견되어 일할 수 있었다. 1899년 의학교관제가 마련될 때 양성소는 의학교에 편입된다. 의학교 교장인 지석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