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와 클라라 무덤의 기념비클라라의 요청대로 자신이 로베르트를 바라보는 형태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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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와 클라라는 여느 가족 구성원 이상의 신뢰와 애정을 갖고 평생을 교류했지만, 이렇듯 진정한 가족의 구성원이 될 수는 없었다. 브람스는 클라라의 73세 생일에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자신의 처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892년 9월 13일
이 불쌍한 이방인이 오늘만은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변함없는 존경을 담아 당신을 생각하고 있으며, 나에게 가장 소중한 당신에게 모든 선함과 친절함과 아름다움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나는, 불행히도 그 어느 누구보다, 당신에게는 이방인인 사람입니다.
클라라에 대한 수십 년의 순애보와 회한이 담긴 곡이 바로 인터메조 Op.118 No.2이다. 음악 자체도 인상적인 데다가 드라마 같은 뒷이야기까지 더해지니 불타오르는 연주 욕망을 참아내기 어려웠다.
브람스가 악보 곳곳에 숨겨 놓은 작곡 의도
일단 꽂히면 엄청난 조급함과 실행력이 발동하는 내 성정으로는, 종이 악보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시간조차 참아낼 수 없어 바로 인터넷을 검색해 PDF 파일 악보를 내려받아 태블릿 PC에 띄워놓고 연습에 돌입했다(물론 악보는 따로 주문했다). 그렇다. 가족에게 '못 할 짓'이 시작된 것이다.
가끔 집에 손님이 오면 흥이 올라 내가 직접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는 경우가 있다. 곡 하나를 그럴싸하게 연주하면 손님이 손뼉을 치며 아내에게 '남편이 피아노 잘 쳐서 좋겠어요'라고 덕담을 건네는데, 그럴 때면 아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지금 딱 결과물만 들으셔서 그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저는 남편이 저렇게 치게 되는 과정을 계속 들었잖아요. 그게 참 못 할 짓이에요."
곡에 대한 애정이 클수록 연습의 빈도와 강도가 상승하는데, 이번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은 인생곡으로 꼽을 정도로 취향을 저격당했으니 그 이후 벌어진 일은 이러하다.
"아빠는 왜 맨날 그 곡만 쳐?"
"여보! 좀 다른 곡도 치면 안 될까? 지겹다 지겨워."
하지만 클라라와 브람스가 우정과 신뢰와 사랑을 나누며 겪었던 세간의 구설과 마음고생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들 장난 아닌가. 이 곡이 내 손으로 온전하게 연주되는 순간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각오로 특훈에 돌입했다. 일단 테크닉 문제를 극복하는 것부터가 난관이었다. 들을 때는 평이하게 느꼈는데, 막상 악보를 펴놓고 한 음 한 음 직접 누르니 아마추어 방구석 연주자에게는 다소 버거운 난이도였다.
하지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매일매일 꾸준히 연습하니 벅차게만 보였던 기술적 문제가 차츰 해결되었고, 어느새 악보에 그려진 음표대로 건반을 누를 수 있는 수준에는 도달했다. 하지만 진정한 어려움은 이제부터다. 소리(sound)를 음악(music)으로 만드는 일이 남은 것이다.
주요 선율이 자연스럽게 인식될 수 있도록 최상성부 음을 베이스나 내성부보다 도드라지게 연주하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만 페달을 밟아서 소리의 울림이 풍성하면서도 자칫 지저분하지 않도록 조절한다. 기분 내키는 대로 연주하다가 머나먼 달나라로 가지 말고, 악보 곳곳에 적힌 악상기호를 숙지해 작곡가의 의도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기술적 문제를 극복하며 점차 곡의 내면으로 스며들다 보면, 손가락 신경쓰느라 분주할 때는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비밀의 화원이 눈 앞에 펼쳐진다. 악보 곳곳에 브람스가 숨겨 놓은 작곡 의도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마치 어려운 퍼즐을 풀어낼 때나 느낄 법한 짜릿함을 경험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다음의 도입부 악보를 보면 '모티브'라고 빨간색으로 표시해 놓은 곳이 있다. 해당 부분의 최상성부 멜로디를 보면 '도#-시-레, 도#-시-라'로 움직인다. 이 짧은 모티브가 다양한 방식으로 곳곳에 등장하며 곡에 통일성과 형식미를 부여하는데, 참으로 절묘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구체적인 몇몇 사례를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