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소장 중인 대위법 관련 책들여섯 권 중 세 권을 중학생 때 구입했으니, 당시 다성음악에 몹시 진심이었던 건 명백하다.
임승수
책 6권 제목에 공통적으로 '대위법(對位法)'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대위법은 쉽게 말해 다성음악을 작곡하는 법칙이다. 한번 생각해보라. 세 사람이 마이크 세 개로 멋대로 노래를 부르면 그 멜로디가 서로 어울리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각 성부가 다른 성부의 음률을 고려하고 배려하며 철저하게 계산 및 계획된 대로 움직여야 비로소 조화로운 소리가 생성된다. 그런 선율을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규칙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대위법'이다. 저 여섯 권 중 세 권을 중학생 때 구입했으니, 당시 다성음악에 몹시 진심이었던 건 명백하다.
그나저나 이런 얘기 하면 저거 다 읽었냐고 묻는 사람 꼭 있더라. 사람을 꼭 그렇게 코너로 몰아붙여야겠는가? 중학생이 바흐의 다성음악에 홀려 충동구매 했다가 앞부분 읽고는 바로 현타 왔다는 정도로 이해해달라. 솔직히 질문하는 쪽도 수학 정석이랑 성문 기본영어 앞부분만 까맣지 아니한가. 서로 선은 넘지 말자.
바흐가 '노래하듯이' 연주하라고 한 인벤션
세월은 흘러 어느덧 중년 아재가 되었고, 어린 두 딸에게 멋진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피아노 연습을 재개했다. <소녀의 기도>나 <은파> 같은 곡은 소싯적에는 그렇게 달달하게 들릴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악보를 들쳐 보지도 않는다. 이 나이 되어서까지 솜사탕을 사 먹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바흐 인벤션은 여전히 꼬박꼬박 연습한다. 곡이 손과 귀에 익으면 익을수록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본업이 따로 있는 성인 남성이라 연습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지만, 꾸준한 인벤션 연습을 통해 실력 향상에 상당히 큰 효과를 보았다. 대가 중의 대가인 바흐가 자식의 음악 교육 용도로 만든 곡이라더니 역시 뭐가 달라도 다르다. 오른손과 왼손이 독립적인 멜로디를 연주하니 상대적으로 취약한 왼손 단련에 특효약이다.
바흐는 인벤션 연습을 통해 칸타빌레(cantabile) 주법을 익히라고 자필 악보에 적었다고 한다. 칸타빌레는 '노래하듯이' 연주하라는 의미다. 악보대로 건반을 누르면 노래가 되는 것 아니냐고 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초등학생이 국어책 읽듯이 기계적으로 건반만 눌러대서는 도무지 칸타빌레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연속되는 음을 들으며 그것을 '노래'라는 형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유는 기억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0.5초 전의 일을 기억할 수 없는 존재라면 내 귀로 들어오는 음은 앞서 연주된 음과의 관계성을 상실해, 공기의 진동이라는 물리적 현상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연속된 소리의 울림이 노래가 되고 음악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현상을 수용하는 주체의 적극적인 의식 작용 때문이다. 이미 연주된 음들은 소리의 울림이라는 측면에서는 수명을 다했을지라도 청자의 내면에서 기억이라는 형태로 살아남아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의 음이 관계성을 형성해나간다. 바로 그 관계성이 '노래', 즉 칸타빌레의 핵심이다.
과거의 음이 만들어놓은 맥락 안에서 현재의 음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 그 음은 앞선 음들의 생명력을 이어받아 노래의 구성 요소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칸타빌레를 오롯이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연주하는 음들을 주의 깊게 살피며 선율 안에 일관된 느낌을 담아내야 한다. 일렁이는 감정의 미세한 선을 부여잡고 한 편의 시를 읽는 느낌으로, 짧은 선율에도 사연을 담아 건반을 누르라는 의미다.
주제 선율이 어느 손에 등장하느냐에 따라 양손의 음량을 적절하게 조절할 필요도 있다. 대체로 주제 선율을 연주하는 쪽의 소리를 키워서 부각한다. 가수 두 명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경우 주요 멜로디를 담당하는 쪽이 좀 더 크게 부르지 않는가. 같은 이치다.
집에서 취미로 슬렁슬렁 바흐 인벤션 정도 치는 주제에 무슨 프로나 되는 것처럼 이것저것 따지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방구석 와인 애호가라고 싸구려 와인만 먹나. 그렇지 않다. 와인 전문가만 좋은 와인을 마실 자격이 있는 게 아니듯, 아마추어 연주자의 고막도 좀 더 품격 있는 공기의 떨림을 추구할 수 있는 법이다. 심지어 그 고급진 떨림을 내 손가락으로 구현한다면, 그 뿌듯함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다.
게다가 내가 앞서 칸타빌레가 어쩌고, 양손의 음량 조정이 저쩌고 했는데, 솔직히 프로의 관점에서 보면 기본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의 얘기다. 당장 전공생 수준으로만 들어가도 곡 해석에서 차원이 다른 영역이 펼쳐진다.
예를 들어보자. 바흐가 살던 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피아노가 없었다. 현대의 피아노(정식 명칭은 피아노포르테)는 건반을 누르면 연결된 해머가 현을 때리고, 그렇게 생성된 소리를 울림통으로 증폭하는 악기다. 이전의 건반악기보다 음색이 훨씬 다채롭고, 셈여림 표현이 자유로우며, 페달을 사용해 음을 길게 지속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바흐 시대의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 같은 건반악기는 그 구조상 음색도 단조롭고 소리도 작으며, 셈여림 표현이 매우 제한적이고, 건반을 눌러 생성된 소리가 금세 소멸한다. 그렇다 보니 선율을 연주하더라도 음이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어진다.
바흐는 당연히 하프시코드, 클라비코드의 소리를 염두에 두고 건반음악을 작곡했다. 그래서 바흐의 건반음악을 현대의 피아노로 연주할 때 레가토(legato) 주법으로 부드럽게 연결해서 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음표마다 살짝 끊어치는 식의 논레가토(non legato) 혹은 스타카토 주법을 사용해야 바흐가 사용했던 옛 건반악기의 느낌을 살려 연주할 수 있다. 이런 주법을 모든 음표에 고르게 적용하는 동시에 '노래하듯이(칸타빌레)' 연주해야 하니, 제대로 연주하려면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훨씬 성능 좋은 악기를 갖다 놓고는 굳이 옛 악기 스타일로 연주할 필요가 있겠냐는 거다(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바흐가 타임슬립해서 현대의 피아노를 만난다면 성능 좋아졌다고 감탄하겠지, 굳이 성능 떨어지는 옛날 악기 느낌 살리겠다고 툭툭 끊어서 연주할까?
심지어 인벤션을 연습할 때 '칸타빌레' 주법을 익히라고 바흐가 일부러 자필로 악보에 써놓기까지 했다. 노래 부르듯이 연주하려면 툭툭 끊어치지 말고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레가토 주법이 더 낫지 않을까. 좋은 악기를 놓고 억지로 메밀 100% 면발처럼 툭툭 끊어서 치느니, 차라리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를 가져와서 그걸로 연주하는 편이 나아 보인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숨 좀 돌릴 겸 유튜브에서 바흐 스페셜리스트 글렌 굴드의 연주를 찾아 들었다.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일부러 논레가토 및 스타카토 주법을 살려 툭툭 끊어 연주하는데, 손끝에서 창조해내는 소리의 유려함과 정밀함에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직접 연주해 본 곡이라 음표 하나 쉼표 하나 빠짐없이 들리니,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기량의 격차가 괴로울 정도로 생생하다. 이런 게 바로 전공의 영역, 프로의 영역이지!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글렌 굴드 님이 옳네요. 역시 면발은 툭툭 끊어지는 100% 메밀면이 갑입니다.
이내 짙은 좌절감이 밀려온다. 아무리 방구석 아마추어라는 방어막을 쳤지만, 나 따위가 감히 바흐를 연주해도 되는 걸까? 의욕이 머리카락이라면 모근까지 완벽하게 뽑혔다. 방구석 아마추어 심정도 이러한데, 연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프로 피아니스트는 글렌 굴드 연주를 듣고 어떤 감정이 들까?
인간이 기억력을 통해 노래와 음악을 인식한다지만, 망각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며칠 지나면 글렌 굴드의 연주를 잊은 상태로 피아노 건반을 누를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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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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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인벤션, 연주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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