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도서관 설립자 윤익선 일제강점기 <조선독립신문> 사장, 만주 동흥학교 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다. 천도교도인 그는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다. 윤익선은 1920년 11월 취운정에 '경성도서관'(지금의 종로도서관)을 개관했다. 그는 3.1 운동 이후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투옥 당시 작성한 윤익선의 인물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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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업적으로 계훈모는 한국신문인편집협회가 발간한 <신문백년인물사전>(1988)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학연구인명록>(1983)에 등재되었다. 언론 분야 연구자로 인정받은 계훈모지만, 정작 자신이 18년 동안 일한 도서관 분야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계훈모는 언론 분야 외에도 목록 정리 작업을 이어갔다. <3.1운동관계 문헌목록>(신인간 통권 294-296호, 1972), <천도교(동학)관계 문헌목록>(신인간 통권 306-309호, 1973), <사마방목총록>(1982)이 언론 외 분야에서 계훈모가 이룬 성과다.
300호 중에 보관본이 절반도 되지 않았던 <천도교회월보> 영인본도 계훈모의 노력으로 출간할 수 있었다. 1996년 4월 7일에는 <독립신문> 영인본 발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LG상남언론재단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천도교 문헌을 정리한 것은, 그가 천도교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계훈모의 할아버지(계기간), 아버지(계연집), 어머니(방연화), 그의 아내(문용자)도 모두 천도교 교인이다. 계훈모는 1970년 천도교 서울교구로부터 '영암'(英菴)이라는 도호(道號)를 받았다. 그는 1977년 서울교구 교화부장을 거쳐, 1983년부터 1995년까지 천도교 교훈을 지냈다.
한국 근대도서관의 탄생 과정에서 천도교가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1920년 종로도서관의 전신인 '경성도서관'을 개관한 윤익선 역시 천도교 고위 간부였다. 경성도서관 개관 당시 초기 자금의 40%를 윤익선과 천도교가 부담했다. 경성도서관 개관은 사실상 윤익선 개인의 도서관 건립이 아니라, 1920년대 천도교가 펼친 교육.출판.문화운동의 일환으로 바라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천도교가 배출한 '선구적 도서관인'을 꼽는다면, 해방 이전에는 윤익선을, 해방 이후에는 계훈모를 꼽을 수 있다.
그가 '오장육부를 빼놓고' 도서관에 드나든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