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모습.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가정적으로는 좋은 가문에 태어났지만 그의 출생과 성장 시기는 국내외적으로 폭풍우가 밀려오는 격동기였다. 태어나기 2년 전인 1876년 2월 일본은 구로와 기요타카(黑田淸降)이 8척의 군함과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와 강압적으로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정해 조선의 침략을 쉽게 하려는 목적과 함께,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인의 통상 활동과 조선 연해의 자유로운 측량을 가능케 함으로써 정치ㆍ군사 면에서 거점을 마련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으로 1597년 일본군이 퇴각한 지 279년 만에 다시 군사위협으로 조약을 맺고 이 땅에 다시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신규식의 운명은 철저하게 일본의 침략과 관련되어, 활동하고 투쟁하다가 젊은 나이에 이역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어서 1882년 제물포조약으로 일본군이 영사관 보호 명목으로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으며 일본의 경제침투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시국은 날로 악화되었다. 일본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도 조선에서 이권쟁탈을 벌였다. 갑신정변이 100일 천하로 무너졌으며 영국군이 거문도를 점령하고,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ㆍ김개남 등이 중심이 되어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다.
이즈음 신규식은 15세의 나이로 그동안 학문에 열중하여 단재 신채호ㆍ경부 신백우와 더불어 '산동삼재(山東三才)'로 널리 알려졌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총명한데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넉넉한 편이어서 가숙(家塾)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독파하고 시문을 지어 그 우수성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산동삼재'의 소년들이 시문(詩文)에만 전념하고 있기에는 나라 사정이 날로 험악해져 가고 있었다. 어느 시대나 정의로운 젊은이들은 있게 마련, 소년 신규식도 그 중의 하나였다. 소년의 꿈을 빼앗아 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점점 불타올랐다.
주석
2> 장영심, 『신규식의 생애와 독립운동』, 18쪽, 독립기념관, 1992.
3> 『예관 신규식전집(제1권)』, 302쪽, 예관 신규식전집 편찬위원회, 2020.(이후 『전집①②』)로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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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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