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한 매스 게임에 동원된 학생들의 모습
해냄에듀 한국사 교과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막막해하던 그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물꼬가 터졌다. 교과서에 실린 사진 한 장이 남과 북의 이질감을 누그러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다.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의 문제가 아니라, 분단과 전쟁 이후 남북 모두 오랫동안 독재 정권이 국민의 삶을 옥좼음을 증명하듯 보여주고 있다며 놀라워했다.
사진은 1950년대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하는 매스 게임에 동원된 중고등 학생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운동장에도, 관중석에도 동원된 학생들이 빼곡한데, 대통령의 초대형 사진이 한가운데 우뚝하다. 취임 이듬해인 1949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은 국가 기념식으로 진행되었고, 국기 게양이 의무화됐다. 말 그대로 이승만 우상화 작업이었다.
아이들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김일성 우상화라면 익히 들어봤어도, 이승만 우상화는 금시초문이라는 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이냐며 되레 반문하기도 했다. '태양절'이 북한 혐오의 이유라던 아이는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적어도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에도 '태양절'이 있었던 셈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6.25 전쟁 직후 남북의 독재 정권이 똑같이 야만적인 행태를 보였다는 걸 깨달은 것만으로도 놀라운 수확이었다. 그제야 아이들은 '적대적 동지 관계'라는 말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게 됐다는 눈치였다. 지금껏 김일성의 일당 독재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대조하는 교육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과서의 서술부터 단원 배치까지 별도로 편성됐다.
이는 2015 개정 교육과정으로 한국사 교과서가 대폭 개편된 효과다. 알다시피, 개정된 한국사 교과서는 개항 이후 근현대사 부분이 전체 분량의 3/4에 이른다. 근현대사 중심의 교과서 개편은 학계와 교육계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사안으로, 역사 교육의 본령에도 부합하는 변화다. 동시적으로 남과 북의 사회 모습을 대조하도록 구성되어 있어 학습에 여러모로 유용하다.
아이들은 김일성의 반미주의와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내용만 다를 뿐 본질은 같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해냈다. 전쟁 직후 정적 제거를 위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 역시 목적도, 방법도, 시기도 거의 똑같다고 말했다. 한편, 한 아이는 김일성이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한 반미주의가 자충수가 되어 되레 국제적 고립과 경제 침체를 자초한 것 같다는 주장도 폈다.
사진 한 장이 가져온 '나비 효과'다. 다시금 통일 교육은 역사 교육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틀에 박힌 이분법적 사고를 혁파하려면, 해방 이후 우리 현대사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듯하다. 이전까지 아이들이 북한의 역사에 대해 아는 거라곤, 주체사상과 천리마 운동, 그리고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뿐이었다.
통일 교육에 지금껏 '공자 왈, 맹자 왈'이었던 교과서의 도움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방해만 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다른 곳의 사진이나 영상을 그들에게 보여주었다면, 일단 의심부터 했을 게 틀림없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통일 교육에 임하고 있는데, 교과서의 공신력을 활용할 방법부터 찾아봐야겠다.
아이들의 북한 혐오가 완고한 상황에서, 통일 교육은 최대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 지나친 충격을 주어도 곤란하고, 그렇다고 통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그렇다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며 당위적으로 접근해서는 아이들을 감화시킬 수 없고, 합리적인 근거와 논리로 차분하게 설득해나가야 한다.
'북한을 조선'으로 부르는 것에 아이들은
최근의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요즘 북한이라는 국명을 조선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 아이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다. 이는 한 동료 교사의 문제 제기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의외로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북한이라는 건 '북쪽의 대한민국'이라는 뜻으로, 흡수통일을 전제하는 명명이라는 지적에 적잖은 아이들이 동의했다. 과거 '괴뢰 집단'으로 부르던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UN에 공식 가입됐다는 이유만으로 '정상 국가'로 인정할 순 없다는 아이들도 많다. 국제 사회가 두루 인정하듯, 실상은 '권력을 세습하는 봉건 왕조' 아니냐는 거다. 그들이 우리를 남조선이라고 칭하듯, 우리도 북한이라고 명명하는 게 뭐가 문제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런 주장도 나온다. 남과 북 모두 통일을 염두에 둔다면, 대한민국과 조선이라는 서로 관련이 없는 듯한 이름으로 불리기보다, 남과 북의 주민들에게 나머지 반쪽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같은 이름을 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이라 부르고, 북한에서 남조선이라 부르는 게 통일에 장애가 되진 않을 거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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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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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의 흑백 사진 한 장이 가져온 나비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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