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호박고지 나물 어렸을 때, 내가 싫어했던 음식. 어정쩡한 맛과 컬러가 마음에 안 들었다. 내 나이 마흔여섯에야 이 거무튀튀한 음식과 사랑에 빠졌다.
안소민
호박고지를 한 번 씻어서 미지근한 물에 불린다. 너무 풀어질 때까지 불릴 필요 없이 약 30분이면 충분하다. 그동안 육수를 준비한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린 물이다. 들깻가루에 물을 넣고 섞어 들깻가루 베이스를 만든다. 물에 불린 호박고지는 한번 씻어서 물기를 꼭 짜서 먹기 좋게 한 입 크기로 자른다.
엄마는 호박고지 나물을 독학으로 익혔다고 한다. 엄마가 어린 시절, 엄마를 키워주신 이모가 만들어줘서 먹은 기억은 있었지만 어린 나이라서 본격적으로 배우지는 못했다.
결혼 후, 제사상에 오른 들깨 음식을 아빠가 무척 잘 드시는 걸 보고, 연구해 보았단다. 꼭 정월대보름이 아니더라도 우리 밥상에 들깨 음식이 자주 올라왔던 이유는 바로 아빠 때문이었다. 엄마의 들깨 음식을 좋아했던 사람들이 또 있었으니, 엄마의 친구들이었다.
"옥잠화(엄마의 고등학교 동창 모임 이름)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내가 이 호박고지 나물을 만들어갔거든. 그때 다들 어찌나 그 나물을 맛있게 먹었는지… 지금도 만나면 애들이 나한테 그 얘길 꼭 한다. '네가 만들어준 호박고지 나물 너무 먹고 싶다', '너무 맛있었다'라면서."
"그때가 언제였는데?"
"한 30년 됐나... 그때 내 나이가 마흔여섯이었으니까."
헉. 지금 딱 내 나이다. 역시 들깨음식은 마흔여섯은 되어야 그 진가를 알게 되는 음식인가보다. 어른의 맛이다.
호박고지에 다진 마늘과 집간장, 참기름, 통깨를 넣고 주물주물 무친다. 그 뒤에 팬에 기름을 두르고 호박고지를 볶는다. 물을 섞은 들깻가루물 중 윗물을 넣어서 함께 볶아준다. 나물을 볶을 때 기름만 넣고 볶으면 나물이 딱딱해진다. 적당한 물과 함께 볶아주는 게 팁이다. 이때 육수를 넣어서 자박자박 끓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밑에 가라앉은 들깻가루를 넣는다. 들깻가루를 한꺼번에 쏟아 붓지 않고, 본인의 식성에 맞게, 점성과 농도를 봐가면서 넣는 게 중요하다. 대파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통깨를 뿌려낸다.
꼬들꼬들해서 더 맛있는 연륜의 맛
겉보기엔 쭈글쭈글 별 매력 없어 보이지만 한 입 씹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어라? 쫄깃한 게 딱 고기 식감이다. 이 꼬들꼬들함. 어리고 여린 것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꼬장꼬장한 맛. 여리고 부들부들해서 꿀꺽 삼켜버리는 게 아니라, 꼬들꼬들해서 더 오래 씹고 음미하고 싶은 이 연륜의 맛. 부드럽고 고소한 들깨의 풍미가 어우러지며 아무리 먹어도 탈이 안 날처럼 순한 느낌이다. 주름 자글자글한 할머니의 미소를 보는 맛이랄까.
호박고지 나물. 나는 왜 너의 진가를 왜 이제야 알아보았던가. 때가 되어야 아는 것들이 있다더니, 음식도 그 나름의 때라는 것이 있나 보다. 평생 들깨 음식을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마흔여섯에야 나는 들깨 음식과 사랑에 빠졌다. 이른 아침부터 믹서기 소리로 나를 흔들어 깨웠던 엄마의 들깨 음식들이 30년이 지나 내 마음에 '수신 완료'된 것일까.
엄마는 이제 더 이상 믹서기를 사용하지 않고, 광목천이니 나무채반이니 하는 번잡한 것들을 꺼내어 사용하지 않으신다. 근 50년 동안, 식구들의 삼시세끼를 챙겨 오신, 지금도 챙기고 있는 나이 드신 엄마의 그 귀차니즘(?)을 나는 백번 천번 이해한다. 아니, 이해해야 한다.
쭈글쭈글하지만 지난여름의 태양을 품고 있는 호박고지 나물. 그 안에 엄마가 보인다. 한 입 넣으면 푸른 여름 싱싱한 호박 맛도 떠오른다. 맛있다. 그런데 눈물이 난다. 맵지도 않은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는 희한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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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의 호박고지 나물 엄마가 해주시던 호박고지 나물. 정월대보름 무렵에 더욱 생각나는 엄마의 음식. ⓒ 안소민
정선환 여사의 호박고지 나물 레시피 |
1. 호박고지는 가볍게 씻어서 미지근한 물에 불린다. (너무 풀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2. 육수는 멸치와 다시마를 넣어 만든다.
3. 호박고지가 물에 불 동안, 들깻가루를 물과 섞어서 가라앉힌다. (비율은 들깨가루 4스푼에 물은 1컵)
4. 물에 불린 호박고지를 씻어서 물기를 꼭 짜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다.
5. 다진마늘과 집간장, 참기름, 통깨를 넣어 호박고지를 조물조물 무친다.
6. 팬에 식용유를 두른 뒤, 양념한 호박고지를 볶는다. 이때 3의 맑은 물을 넣으면서 볶는다. (기름으로만 볶으면 나물이 딱딱해진다.)
7. 물을 넣고 끓이다가 가라앉힌 들깻가루를 넣으면서 농도를 맞춘다.
8. 마지막으로 어슷어슷 썬 파를 넣고 한소끔 끓인 뒤 상에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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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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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여섯에 알게 된 '어른의 맛',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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