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경향신문 첫 배달지역이었던 현재 북촌 가회동 거리
박도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아일보 배달원
당시는 <동아일보> 배달원 수입이 가장 많았다. 그 다음 <조선일보>, <한국일보> 순서였다. <동아일보>나 <조선일보>는 한 배달원의 배달부수가 200~300부 정도였으나 그때 <경향신문>은 50~60부 정도였다.
그때 나는 배달구역도 좁고, 부수가 가장 많은 <동아일보> 배달원이 몹시 부러웠다.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배달원들은 경쟁자지만 서로 알고 지냈다.
어느 날 나는 김대식이란 <동아일보> 계동 배달원에게 배달 자리를 부탁했다. 그러자 그는 대뜸 학교 다니느냐고 물었다. 휴학 중이라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고 답했다.
그러자 자기네 보급소에서는 재학생만 배달원으로 쓴다고 했다. 그 말이 송곳으로 가슴에 찔리듯 아팠다. 그는 시무룩 돌아서는 내가 측은하게 보였던지 위로했다. 그 무렵 자기네 보급소에는 자리도 없다면서 내가 학교에 복학을 하면 꼭 알아봐주겠다고 말했다.
나의 배달 코스는 보급소인 낙원동에서 재동 창덕여고(현 헌법재판소)를 시작으로, 가회동 한옥마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왼편 삼청동으로 넘어가서 화동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안국동 당시 윤보선 대통령 댁에 이르면 끝이었다. 조간 배달 때는 거의 사람들이 없었지만 석간 배달 때는 학생들이 몹시 붐볐던 지역이었다.
그 무렵 그 일대는 경기, 덕성, 풍문, 창덕, 중동, 숙명, 수송전기공고 등 학교가 많았다. 석간 배달 때 마름모꼴 명찰을 단 경기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보면 열등감에 젖었다. 덕성이나 풍문여고 학생들과 마주치면 무척 창피한 감이 들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며칠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하니까 내 생각이 잘못이었다. 신문배달이 도둑질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학비를 벌기 위한 일이 아닌가. 차츰 열등감이나 창피하다는 생각이 무뎌지면서 그때부터는 고개를 들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