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에서 벚을 맞이하는 다산의 모습.여유당에서 벚을 맞이하는 다산의 모습.
강기희
정조가 죽은 자리는 열한 살의 어린 아들 순조가 승계하고, 영조의 계비이자 순조의 증조할머니 정순대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정순대비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관여했던 인물이어서 앞날의 폭풍우가 예비되고 있었다.
때를 같이 하여 경주 김씨 척족과 오매불망 기회를 노리던 노론 벽파가 실세로 전면에 나서게 된다. 목만중ㆍ이기경ㆍ홍희운(홍낙인의 변명) 등 노론 벽파의 앞잡이들이 서둘러 일을 꾸몄다.
"이가환 등이 장차 반란을 일으켜 사흉팔적(四凶八敵)을 제거하려 한다."는 흉서를 만들어 살포하였다. 자기네 쪽 인사도 몇 명을 끼워넣었다. 사실로 포장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그해 겨울에 정조의 국상이 마무리되었다. 정약용은 가족을 향리로 보내고 혼자 서울에 남아서 국상의 졸곡(卒哭) 행사를 마쳤다. 뒷날 「자찬묘비명」에서 정조의 은총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포의(布衣:벼슬 없는 사람)로 임금의 알아줌을 받았는데, 정조대왕께서 총애해 주시고 칭찬해 주심이 동렬(同列)에서 넘어섰다. 앞뒤로 상을 받고, 서책, 구마(廐馬): 임금이 하사해주시는 말), 무늬 있는 짐승 가죽, 진귀한 여러 물건을 내려 주신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기밀에 참여하여 듣도록 허락하시고 생각한 바가 있어서 글로 조목조목 진술하여 올리면 모두 즉석에서 윤허해 주셨다.
일찍이 규영부 교서로 있을 때에는 맡은 일에 과실을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매일 밤 진수성찬을 내려 주셔서 배불리 먹게 하셨다. 내부(來府)에 비장된 서적을 각감(閣監)을 통해 청해 보도록 허락해 주신 것들은 모두 남다른 운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