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통합당 심재철 원내대표가 4월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최고위원회의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남소연
국민 100만 이상의 발의로 헌법개정이 제안될 수 있도록 하는 국민발안제 개헌이 무산될 상황에 처했다. "헌법 개정은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는 현행 헌법 제128조 제1항에 '국민 발안에 의한 제안'을 추가하여 "헌법 개정은 국회의원 선거권자 100만 명이나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 또는 대통령의 발의로 제안된다"로 바꾸는 일이 흐지부지되게 생긴 것이다.
헌법 제128조 제1항 하나만의 개정을 추진하는 이번 원포인트 개헌은, 26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국민발안개헌연대와 강창일·김무성 등 여야 의원들로 구성된 국회 국민발안개헌추진위원회의 합작으로 지난 3월 14일 국회의원 148명이 발의자로 나섬에 따라 추진됐다.
하지만, '개헌안 제안'의 다음 절차인 '개헌안 공고'로부터 60일이 되는 이번 9일까지 '개헌안 국회 의결'이 이뤄지지 않으면 다음 단계인 '개헌안 국민투표'에도 가지 못하고 중도 폐기된다.
4·15 총선에 가려 주목을 받지 못한 점, 여야 정치권이 적극적이지 않은 점과 더불어 이번 개헌의 발목을 잡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국민이 개헌 발의권을 갖는 것에 대한 보수세력의 경계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 경계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유신헌법 등장 직후 박정희 대통령의 반응에서도 잘 드러난다.
"뒤집으려는" "불순한"
국민발안제가 도입된 것은 1954년이다. 그해 11월 29일 등장한 1954년 헌법의 제98조 제1항은 "헌법 개정의 제안은 대통령, 민의원 또는 참의원의 재적의원 3분지 1 이상 또는 민의원의원 선거권자 50만인 이상의 찬성으로써 한다"고 규정했다.
그로부터 18년 뒤 이 규정은 박정희에 의해 폐지됐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 등의 격동 속에서 국민들이 헌법개정을 발의해볼 기회도 없이 1972년 유신체제 등장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그해 12월 27일 등장한 유신 헌법의 제124조 제1항은 "헌법의 개정은 대통령 또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로 제안된다"고 함으로써 국민발안권을 삭제했다.
당시 박정희는 <관보> 제6288호에 실린 '헌법 개정안 공고에 즈음하여'라는 특별담화문에서 "나는 이 헌법 개정안의 공고에 즈음하여 이 땅 위에 한시바삐 우리의 실정에 가장 알맞은 한국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려 올바른 헌법질서를 확립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우리 국민 모두의 줄기찬 헌신을 촉구하는 바입니다"라는 말로 개헌 동기를 설명했다.
그가 뿌리를 내리고 싶다고 했던 한국적 민주주의의 실체는 유신헌법 제124조 제2항에서 잘 드러난다. 제124조는 제1항에서 헌법개정 제안권을 대통령과 국회에만 부여한 뒤 제2항에서 이렇게 규정했다.
"대통령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민투표로 확정되며, 국회의원이 제안한 헌법개정안은 국회의 의결을 거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결로 확정된다."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안은 국회 의결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국민투표로 확정하도록 했다. 대통령이 제안한 국민투표가 부결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므로, 이는 국회에 포진한 야당의 견제를 피하고 개헌권을 독점하겠다는 의도를 표출하는 것이었다.
한편, 국회가 제안한 개헌안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의결을 거치도록 했다. 유신헌법 제36조 제1항 및 제2항에 따라 2000~5000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대통령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이끄는 것은 바로 대통령이었다. 제3항은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고 규정했다.
이랬기 때문에, 대통령이 제안하는 개헌안뿐 아니라 국회가 제안하는 개헌안 역시 결국 대통령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었다. 유신헌법을 지키는 것이든 바꾸는 것이든, 개헌 주도권을 독점하겠다는 박정희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말한 한국적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개헌 주도권을 독점하겠다는 박정희의 욕망이 헌법 제124조에서 표출된 점을 볼 때, 그가 국민발안권을 삭제한 이유 역시 자연스레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국민이 주도하는 개헌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회가 제안하는 개헌과 달리 국민이 제안하는 개헌에 대해서는 대통령의 개입이 상대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절차도 복잡하고 정치적 명분도 떨어진다. 그런 이유 때문에 국민발안권을 아예 삭제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