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청춘과 맞바꾼 끼니가 없었다면 나의 청춘은 참으로 곤궁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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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살 터울의 나와 여동생이 고등학교를, 남동생이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어머니 끼니 전쟁은 최고조에 달했다고 한다. 막냇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우리는 수세식 화장실과 싱크대가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겨울 찬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설거지를 해야 했다.
"아이고, 지금 생각하면 내가 그걸 어찌해냈나 싶다. 진이가 학교 마치고 내 논 도시락 설거지도 못 했는데, 너희 둘이 각자 도시락 2개씩 들고 밤 10시에 들어오면 눈앞이 깜깜했다. 요즘처럼 급식이 있나 여분의 도시락이 있기를 했나. 오늘같이 춥던 날에도 설거지를 안 하면 내일 새벽에 우리 새끼들 도시락을 못 싸는 거지. 그래도 하루도 안 거르고 했다. 어떤 때는 정말 하기 싫었어. 설거지도 밥도."
엄마는 육십을 한참 넘기고서야 10명의 어릴 적 친구들과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엄마! 대만에서 뭐가 젤 좋았어?"
"너무 신기하더라! 밥을 안 해도 되는 게. 호텔에 딱 누워서 천장을 보는데 내가 이래도 되나 싶더라. 그게 젤 좋더라."
여행 마지막 날, 할머니가 된 엄마들은 좁은 한 방에 모여서 새벽 3시까지 수다를 떨었다고 한다. 내일 끼니 걱정이 없으니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가 않았다고 한다.
우리 삼 남매는 고향을 모두 떠나 객지에 자리를 잡았고, 아버지는 몇 해 전 돌아가셨다. 혼자 계실 어머니를 모두가 걱정했지만, 엄마는 슬픔을 딛고 일어섰다.
"아침은 과일, 점심은 마을회관, 저녁은 먹고 싶으면 먹고 밥하기 싫으면 안 먹는다. 삼시 세끼 끼니 걱정 안 하니 너무 좋다. 소화도 오히려 잘 된다. 내 걱정은 말아라."
엄마의 노동이 없었다면 나의 청춘은 곤궁했으리라
아내의 음식 솜씨가 좋지만 가끔 엄마 밥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는 그 마음을 꾹 참고 시골에 갈 때마다 맛집을 찾아다닌다.
"아들! 오랜만에 왔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 한 끼는 먹고 가야지."
엄마는 이미 신발을 신으시면서 나에게 진심으로 묻는다.
"다음에. 다음에 해줘요."
"그럴래?"
웃으면 따라 나오시는 엄마를 보면 한없이 죄송스럽다.
20년 넘는 회사생활이 고되기도 했지만, 주말이나 휴가 때는 잠시나마 쉬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들은 남편과 자식들이 쉬는 휴일에도 끼니를 준비했다. 엄마의 끼니가 통장에 잔고로 남지는 않았지만, 자식들에게 사랑으로 누적되었다. 엄마의 청춘과 맞바꾼 끼니가 없었다면 나의 청춘은 참으로 곤궁했으리라.
끼니 걱정을 더 안 하게 된 엄마는 기어코 다른 걱정거리를 찾아내긴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 보이신다. 오늘은 며칠 전에 남대문에서 먹은 만두를 엄마에게 택배로 보내야겠다. 고생한 울 엄마의 한 끼를 이렇게라도 책임져주고 싶다.
엄마, 수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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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직 안 죽었다. 출간
찌라시 한국사. 찌라시 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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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을 안 해도 되는 게 너무 신기했다"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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