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당시 일본군의 상륙.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사실상 신뢰성이 모자란다. 당시 대부분의 다른 회원들은 현양사의 중견 회원이었거나 또는 조선ㆍ만주 등 해외에서 많이 활동한 인물들이었다. 그 반면, 내전(內田)은 현양사의 소장 회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활동에도 아무런 경험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이 어리고 경험없는 내전이 천우협을 지휘했다는 말은 믿을 수 없는 주장이며, 더욱이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당의 지도자들이 동학군의 요직과 통수권을 천우협에게 위임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처음부터 '척왜척양'을 주장하여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웠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동학봉기를 빌미로 하여 조선에 군대를 보낸 이후부터는 동학 내부의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현양사나 흑룡회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일본 낭인패와 밀정, 군사들이 수집한 각종 정보는 주한 일본 영사관을 통해 즉각 일본정부에 보고되고 필요한 지침을 하달받아 이를 시행하였다.
다음에 인용한 '보고서'와 '지침'을 살펴보면 일본군의 동학농민군 학살에 따른 병력증파 등 조선침탈이 정확한 정보와 일본 정부의 치밀한 작전에 따라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