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깃발과 당시 집강소 간판당시 동학 깃발과 집강소 현판
고광춘
남원은 동학과 특수한 인연이 깃든 지역이다. 최제우가 이곳 은적암에 10개월 동안 머물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등 동학경전을 완성하고, 이후 호남 포교를 하고, 1892년에는 교조신원을 위해 삼례집회에 남원에서 수 백명이 참가하였으며, 광화문 복합상소에도 이곳 출신 유태홍이 참여하였다.
김개남은 7월 27일 남원에 들어갔는데 전라도 동북부 군현들인 순창ㆍ용담ㆍ금산ㆍ장수 등지의 동학 조직을 장악해서 독자세력으로 활동하였다. 김개남이 거느린 세력은 규모가 매우 컸다. 60여 일 동안 결집한 세력이 적어도 5~6만에서 무려 7만 명이 되는 막대한 세력이라고 하였다. (주석 2)
이와 관련 황현의 『매천야록』은 이렇게 기록한다.
호남적 김기범이 남원을 점령하였다. 그는 전봉준과 2대로 나누어, 전봉준은 전주에서 김학진을 인질로 잡고 일도(一道)를 호령하며 형세를 보아 가면서 진퇴계획을 짰다. 김기범은 동학란이 일어날 때 남원으로 들어가 그곳의 풍부한 농산물을 보고 매우 부러워하였다... 그는 격문을 먼저 보낸 후 들어왔으므로 관리와 백성들은 감히 그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했다.
남원에 자리잡은 김개남은 새로 동학농민군을 조직하는 한편 집강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여 민심을 얻고자 하였다.
주석
1> 이이화, 「남원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성격과 현재적 의미」, 동학학회 제35차 추계 학술대회 발표논문, 2014년 11월 7일, 남원 춘향문화예술회관.
2> 신영우, 「1894년 남원 대도소의 9월 봉기론과 김개남군의 해산배경」, 동학학회 제35차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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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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