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왼쪽)이 3일(현지시간) 미군의 폭격으로 이라크에서 숨진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의 유족을 이튿날 찾아가 조문했다. 4일 이란 국영방송이 생중계한 조문 장면을 보면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딸이 로하니 대통령에게 "누가 우리 아버지의 복수를 하느냐"라고 묻자 로하니 대통령은 "우리 모두다. 이란 모든 국민이 선친의 복수를 할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답했다.
연합뉴스
중동 민주화운동인 2011년 재스민혁명을 연상케 하는 민중 저항의 열기가 이집트·레바논·이란·이라크 등지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 지역에 비장의 한 수를 던졌다. 반미냐 친미냐를 떠나 민중계급이 중동 정치질서에 맞서 싸우던 중에, '솔레이마니 장군 사살'이라는 트럼프의 도발이 뜻밖의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청년실업·경제난·부정부패 등에 염증을 느낀 민중의 분노가 중동 각국을 뒤덮고 있었다. 이라크의 경우에는, 2019년 10월·11월 시위로 380여 명이 사망하자, 현지 시각 11월 29일 아델 압둘 마흐디 총리가 텔레비전에 나타나 사의를 표명했다. 국가권력이 민중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마흐디 총리의 사의 표명은 그냥 표명으로 끝났고, 민중의 염원에 역행하는 사건들이 터져나왔다. 12월 6일에는 반정부 시위 현장에 의문의 무장 괴한들이 출현해 무차별 살상을 감행한 결과, 시위대와 경찰을 포함해 25명이 숨지고 130명이 다쳤다.
분노한 이라크 민중의 공격, 보복에 나선 미국
이런 가운데, 민중의 분노가 미국을 향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월 31일 이라크인 수십 명이 미국대사관 출입문을 부수고 진입해서 불을 질렀다. 미국인들이 가장 민감해 하는 일 중 하나인 미국대사관 습격 사건이 터진 것이다. 당황한 대사관 측은 최루탄 등을 쏘며 시위대에 저항했다. 예전보다는 못해도 미국이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으니, 이라크 민중의 분노가 미국을 겨냥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전두환 신군부 집단의 5.18 광주 학살을 지지했다는 의혹을 받은 미국은 광주·부산·서울의 미국문화원에 방화나 점거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당황했다. 5년간 벌어진 세 사건을 보면서 미국은 한국 민중과의 충돌을 자제하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1987년 6월항쟁에 대한 미군 개입의 자제였다.
그런데 중동에서는 자제를 결심해야 할 필요성이 덜하다. 미국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이라는 라이벌을 의식하지만, 중동에서는 라이벌을 의식해야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다. 미국의 전쟁 도발을 억제하는 요소가 동아시아에 비해 약하기 때문이다.
미국문화원 정도가 아니라 미국대사관이 공격을 받는 상황 앞에서, 미국은 자제보다는 보복을 결심했다. 습격 사건 직후 해병대 100명을 대사관에 배치한 데 이어, 신속대응부대 750명을 현지에 급파한 뒤 병력 추가 파견을 예고했다.
이처럼 미국의 군사 역량이 다시 중동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이라크 바그다드에 체류 중이던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의 거셈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미군의 표적 공습을 받고 숨졌다. 안 그래도 호르무즈해협을 무대로 이란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던 미국이 이라크에서 대담한 도발을 일으킨 것이다.
2011년 재스민혁명은 미국의 영향력 퇴조를 반영하는 사건이다. 미국이 관리하던 중동에서 시민혁명이 격화됐다는 것은 친미정권들에 대한 미국의 관리능력이 약해졌음을 알려주는 징표였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승리'라며 애써 자위했지만, 재스민 혁명은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 같은 재스민혁명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던 2019년 연말에 미국이 벌인 솔레이마니 공습은 중동 정세가 제2의 재스민혁명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차단하는 동시에, 이란에 대한 압박·제재를 명분으로 중동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합리화시켜주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효과들을 얻기까지, 트럼프가 넘어야 할 산이 너무 험난하다. 지금 그는 국제사회로부터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반발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대선 경쟁자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을 곤란케 할 목적으로 바이든 아들의 회사를 관할하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공조해 바이든 부자를 압박하려 했다는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겪었고, 이로 인해 탄핵 정국을 마주했다. 이를 넘어 대선 승리로 가기 위해 공습을 벌인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3일과 4일 미국 전역 70곳에서 반전 시위를 벌인 미국인들 중에는 '전쟁은 재선 전략이 아니다'라는 손팻말을 든 이들이 있었다.
언론에서도 동일한 의혹이 나오고 있다. 4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 '이란과의 전쟁이 오바마 재선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트럼프. 트럼프의 경우는 과연?(Trump thougt war with Iran could help reelect Obama. What about Trump?)'은 "재선에 이기기 위해 이란을 공격하는 (오바마) 대통령에 관해 생각한 적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은 재선 선거가 있는 해에 이란과의 전쟁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오바마가 재선 승리를 위해 이란 전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Trump once said Obama would start Iran war to get reelected)'라는 제목으로 인터넷판에 게재된 4일자 CCN 뉴스는 2011년 11월 16일에 트럼프가 "우리 대통령은 이란과의 전쟁을 시작할 겁니다. 그 사람은 협상할 능력이 전혀 없거든요"라면서 "나는 그 사람이 선거 전에 언젠가 이란을 공격할 거라 믿습니다"라고 발언하는 장면을 방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