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과거 수도였던 본 근처 뢴도르프의 아데나워 총리 사저에 있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왼쪽)과 독일 아데나워 총리 동상 앞에 필자가 서있다.
김택환
대결 대신 협력 택한 드골과 아데나워의 리더십
나폴레옹의 프로이센 침략, 보불전쟁, 1차 세계대전, 히틀러 파리 점령, 2차 세계대전 등... 근현대사에서 프랑스와 독일만큼이나 전쟁을 많이 하고 희생이 컸던 관계도 없을 것이다. 이들 전쟁을 통해 수천만의 인명 피해와 천문학적인 재산 피해를 내기도 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 청년 40%가 사라졌다는 기록도 있다.
1806년 프랑스의 혁명가 나폴레옹 1세는 프로이센군을 격파하고 독일 빌헬름 3세는 러시아로 도망가기도 했다. 이에 보복하듯이 1871년 보불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 빌헬름 1세 황제는 베르샤유 거울의 방에서 대관식을 치르기도 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의 독일 항복조인식이 열린 콩피에뉴 숲 객차를 찾아서 객차에 올랐다. 승전국의 복수를 시위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통치자들은 서로 자존심을 할퀴고 짓밟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철천지 원수였던 프랑스와 독일은 갈등과 대결 대신에 화해와 협력 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위대한 정치리더십에 있었다.
전후 45년부터 55년 10년 동안 프랑스는 1차 및 2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독일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프랑스는 승전국으로 독일에 대한 점령정책이 가장 가혹했다. 자르 지방을 합병했고, 산업지역인 루르 지역의 반환에 반대했다. 또한 독일 건국에서 프랑스는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며 반대했다.
하지만 50년 후반에 프랑스와 독일관계는 극적인 반전 분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철전지 원수에서 최고 우방국가로의 전환이었다. 이같은 변화에는 크게 2가지가 작용했다. 먼저 외교안보적으로 극한 냉전으로 인한 소련의 위협과 유럽에 대한 미국의 개입 때문이었다. 또한 정치경제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은 협력해야 상호 이득이 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움직인 것은 독일 건국의 주역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였다. 그는 여러 차례 프랑스를 방문했지만 샤를 드골 대통령은 만나주지 않았다. 드디어 첫 대면은 1958년 9월 소련의 후르시쵸프가 '베를린 위기'를 일으키기 전 프랑스 콜롱베르-도제글리저에 있는 드골의 고향 마을에서 만났다. 드골은 자서전에서 아데나워에 대해 "선입관하고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두 정치지도자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문명과 개혁에 대한 신념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키고 전체주의에 대항해 투쟁한 기억들이다. 드골 대통령은 망명 정부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고, 아데나워는 나치에 의해 2번이나 감옥에 살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드골 대통령은 이듬해인 1959년 독일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해 '독일 청년에 고한다'는 제목의 강연에서 "(프랑스와 독일 간) 이 높은 장벽의 산을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프랑스가 대대손손의 적이던 독일에게 기분 좋게 손을 내미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드골은 자신이야말로 나치 독일의 역사를 넘어서 독일인에게 사면을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그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드골 자서전에 나오는 구절이다.
두 노정객은 상호 사저를 방문하면서 화해와 신뢰를 쌓아갔다. 독일의 아데나워 총리는 총리 재임 14년 동안 사저에서 출퇴근했다. 뢴도르프라는 라인강 언덕에 있는 사저에는 방 2칸과 거실, 그리고 파빌리옹(서가)이 전부인 소박한 주택에 드골을 초대해 함께 와인을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이후 아데나워 기념관이 된 사저는 유일하기 드골과 아데나워가 손잡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있다.
이를 통해 드골과 아데나워는 유럽공동체라는 EU(초기 ECC)를 건설할 수 있었다. 드디어 1963년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서 양국의 우호조약인 '엘리제 조약'에 양 정상이 도장을 찍어 큰 작품을 만들게 된다.
화해의 전통 계속하는 양국 지도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