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농민전북 정읍군 덕천면 황토재 동학혁명기념탑에 세워진 부조
민종덕
김개남 등이 주도한 동학혁명은 이와 같은 처참한 시대에 광제창생과 보국안민, 척왜척양의 기치를 내걸고 전개되었다. 그리고 관군과 왜병에 의해 처절하게 학살ㆍ진압되고 말았다.
동학혁명이 일어나고 12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이 혁명의 3대 지도자인 김개남은 왜 묻혀지고, 연구서의 한 귀퉁이에 이름 석 자가 나올 뿐일까. 앞으로 정리해 나가겠지만, 한 연구자의 기록에서 많은 것을 유추하게 된다.
전봉준으로 대변되는 일부 지도자는 당시 조선왕조의 대내외적 위기 상황이 민씨척족의 세도정치에 기인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따라서 이 집단은 민씨 척족세력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추대하는 것을 핵심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구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 집단은 대원군을 추대하여 집권한 후 보국안민 실현을 위한 이상적인 권력구조로, 몇 사람의 명망가의 합의정치를 실현하려 하였다. 즉 이들은 조선시대 사림파가 추구하려는 사림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운영 구조인 군신공치(君臣共治)를 구상하였다.
김개남 등 일부 지도자는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를 건설하려는 구상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은 전봉준, 최시형 등의 조선왕조의 국법에 준하는 폐정개혁 등의 활동 요구, 즉 집강소 체제하에서의 활동 요구를 거부하고 더욱 급진적인 폐정개혁 등의 활동을 추진하였다.
이처럼 동학지도자들은 조선왕조 질서 내에서의 개혁을 통한 보국안민 실현, 조선왕조를 전복하고 새 왕조 건설을 목표로 하는 구상을 지닌 지도자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로 인해 동학지도자들은 1894년 농민봉기 시기에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확립하지 못하고 분열ㆍ대립하였다. (주석 6)
주석
4> 정재소, 『다산 시 연구』, 95~96쪽, 창비, 2014 (개정 증보판).
5> 최익한, 앞의 책, 507~508쪽.
6> 이희근, 「1894년 동학지도자들의 시국인식과 정국 구상」, 『한국근현대사연구』, 1998년 제6집,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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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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