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당시 광주를 학살의 근거지로 삼아 시민을 적으로 둔갑, 무참히 살육했다.
5.18기념재단
정호용
광주사태 당시 가장 바빴던 사람 중의 한 명은 정호용이었다. 그동안 발간된 자료들에 의하면, 5월 18일 현지보고를 받은 그는 제3공수특전여단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로 출동할 준비를 갖추도록 지시한 다음,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현지를 시찰, 보고를 받고 급거 상경, 전두환 등 군수뇌부들과 대책회의를 하면서 "계엄군을 증파해야겠다"고 건의했다.
이희성(계엄사령관) : "서울에도 산발적인 움직임이 있는데……"
정호용 : "서울은 더 확대되지 않습니다……제3여단장에게 출동준비를 지시했는데 11여단도 동시에 내려 보내겠습니다."
전두환 : "20사단도 함께 집입시키는 게 좋겠어"
5월 26일 하오 정호용은 광주비행장 사령관실에서 제20사단장 박준병과 3여단장 최세창, 7여단장 신우식, 11여단장 최웅을 불러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TOT(목표상 행동개시)는 내일 새벽 정각 4시다. 절대로 정보가 누설되어서는 안돼."
광주사태 후 정호용은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이후 승진을 거듭, 83년 정규 육사출신으로 최초의 육군참모총장이 된 그는 85년 대장으로 예편했다.
박준병
5ㆍ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 그는 유일한 사단장급으로 참석했다. 육본 직할의 하나밖에 없는 서울 주둔 부대장으로 참석한 것이다.
소위 '경복궁팀' 중의 한 사람으로 12ㆍ12에 참여했던 그는 5월 20일 밤 10시 휘하 부대를 광주로 투입시키고, 자신은 21일 새벽에 사단사령부와 추가로 보내는 1개 연대를 이끌고 광주로 갔다.
광주사태를 둘러싼 주요 쟁점 중의 하나는 진압작전이다. 그는 88년 7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은 우리 사단을 포함해서 31사단의 일부 병력, CAC의 보병학교ㆍ포병학교 병력, 그리고 공수단 등도 함께 나누어 맡았습니다. 그중 우리가 가장 넓고 중요한 부분을 맡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시의 작전명령은 지금 원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무튼 5월 25일 오전 CAC사령부에서 26일 D데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어요. 그 명령을 근거로 이후 사단에 명령을 내렸습니다."
- 진압작전을 할 때 20사단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당시 광주시내의 도청ㆍYMCAㆍ사직공원에는 상당히 조직화된 시민군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 지역은 일단 공수단이 제압한 후 우리에게 인계해주기로 했어요. 나는 우리 사단의 책임구역을 바둑판처럼 구분, 주요지역, 우리가 장악해야 할 지역마다 번호를 붙이고, 각 단위부대별로 책임져야 할 지역을 분담시켰습니다. 모두 27일 새벽 4시 반까지 책임지역에 도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새벽 1시경에는 모두 주둔지를 떠났습니다."
그와 그의 휘하부대 20사단은 광주사태가 진압된 후에도 한 달 가까이 광주에 있다가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