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당시 <제국의 위안부> 박유하 교수를 인터뷰한 <아사히 신문>기사
최우현
그런 반면 <제국의 위안부>가 ▲ '일본인' 위안부의 입장에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황을 재단했다거나 ▲ 위안부 피해자들의 직접적인 인터뷰가 활용되지 않았다는 점 ▲ 한국어판과 일본어판의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점 ▲ 각계 380명의 인사들이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반대적 성명'을 낸 사실 등 <제국의 위안부>에 비판적인 분석과 보도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는 보수에 대한 비판의식을 잃은 채 '우경화'하고 있는 일본 진보진영의 현주소를 잘 나타내 주는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본의 진보진영은 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우익과 타협했을까? 이러한 '진보진영의 몰락' 현상에 대해서는 서경식, 정영환 등 사학자들에 의한 비판적 진단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오슬로 대학 박노자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고자 한다.
박노자 교수는 오랜 기간 정치의 주류가 되지 못한 일본의 진보세력들이 주류가 되기 위해 '민족주의'를 가미한 우파적 전향을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 진보진영의 "우향우에 필요한 알리바이를 제공해"주었다고 집는다. 이는 일종의 도덕적 면죄부와도 같은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이와 같은 상황이다.
A :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모집에 응한 사람들이더군.
B : 정말? 그건 우익들의 일방적 주장 아닌가?
A : 아니야, 한국인도 그렇게 말하더라니까?
B : 그런가. 앞으로는 위안부의 자발성을 언급해도 비난은 피할 수 있겠군. 한국인도 그렇게 말했으니까.
A : 그러니 앞으로는 여론의 대세에 적당히 맞추자고.
(*본 대화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구성한 상황임)
또 박노자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가 가진 "은근한 역사수정주의"도 일본의 진보들의 '우경화'에 한몫했음을 덧붙인다. 이를테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 소재'를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위안부를 모집하러 다닌 '조선인 업자'에게로 돌리는 듯한 서술 행태를 말한다.
박유하의 논리를 받아들이면 위안부 문제로 화해를 거부하는 한국인/조선인 민족주의자들과 선을 그어 일본 주류의 자민족 중심주의에 더 가까워지는 한편, 진보 진영에서의 기존의 포지션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사실상 가해자의 책임을 면책시켜주는 박유하식 '은근한 역사수정주의'는 그만큼 '연성'전향에 안성맞춤이었다. - 정영환,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 중, 박노자 교수 '해제'
이 같은 일본 진보진영의 타락은 <제국의 위안부>가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얻는데 기여하고 말았다. 나아가 그들은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과 한국 국민들의 분노를 단순 반일 민족주의로 취급했다.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내셔널리즘으로 취급해야 할까? 그 또한 민족주의의 한 행태라며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이라는 국가의 책임을 부정하는 '가해자로서의 내셔널리즘'과 비교될 것은 아니다. 결국 일본 진보진영은 자기 안에 숨겨진 가해자로서의 내셔널리즘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한일 양국민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반일 종족주의> 시험대에 올라선 일본의 진보
<반일 종족주의>는 위안부, 징용노동자들의 아픔이 '개인의 선택', 즉 자발성에 의거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다시 말해 위안부, 징용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제국의 시스템에 동참한 것이므로 일본에 국가적 책임을 지울 수 없으며 순전히 개인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 극우가 지향하는 역사수정주의 관점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이들의 역사관을 따라가다 보면 일본은 전쟁범죄에 대한 국가적 책임에서 해방된다. 모든 것이 결국 '개인의 선택'이었으므로 국가의 잘못은 상쇄되며 일본이 사과를 해야 할 이유도, 역사에 겸허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나아가 애초부터 잘못이 '없었으므로', 일본이 과거처럼 군대를 보유하는 등 보통국가의 시스템을 갖추는 것에도 걸릴 것이 없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반일 종족주의>와 일본 극우가 지향하는 일본판 내셔널리즘의 미래라 볼 수 있다.
스스로가 이토록 일본적 내셔널리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는데도 불구하고 <반일 종족주의>와 일본 극우세력들은 외려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과격한 민족주의'인 양 취급하고 비난까지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일본의 진보는 바로 이러한 내셔널리즘을 비판해오며 성장했다. 서경식 교수의 저서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등에 따르면 일본의 진보는 2차 대전 후 등장한 '평화주의' 가치를 옹호하며 군대 보유를 금지한 현행 일본 헌법을 지지하고 있다.
더불어 아시아 민족들과의 평화적 관계 구축을 지향하고 보수파의 내셔널리즘과 국가주의를 비판, 국가에 희생 당한 소외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자기 정체성을 키워왔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이 한국의 역사문제에 다소나마의 성의라도 보일 수 있었던 근간에는 바로 이러한 사상적 배경이 있었다.